여전히 관객들을 끌어모으는 희대의 흥행 장르, '재난 영화'가 겪어온 '아비규환'의 변천사

'재난 영화' 붐이 돌아왔다고 떠들썩했던 일도 벌써 과거지사로 돌아서 버렸고, 이제 '재난 영화'는 '만화 원작 영화화'나 '디즈니 CG 애니메이션'처럼 여름마다 전세계 극장가를 공습해 대단한 흥행수익을 거둬들이는 고정 블록버스터 아이템으로 굳혀졌다. 아무도 이 '재난 영화' 붐이 왜 20여년 만에 돌아와 '장기집권'에 성공하고 있는지 명확한 이유를 대진 못하지만, '재난 영화'는 이제 그 자체로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을뿐더러, 다른 많은 장르들에도 영향을 끼쳐 '모든 액션 블록버스터엔 재난 영화적 요소가 반드시 끼어있다'는 이야기가 점차 정설화되어가는 실정. 이제 이 파괴적인, 엄청난 제작비 상승을 불러일으킨, '타인의 불행을 즐긴다'는 측면에서 정신분석학적 논란까지 야기될 수 있을 법한 '재난 영화'에 대해 철저히 분석해보고, 과연 '재난 영화'란 어떻게 탄생되었으면 어떤 발전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재난 영화'의 창생, 역사를 되짚는 비극적 스펙터클의 가능성 일반적으로 '재난 영화'는 1970년대의 거물급 제작자이자 감독인 어윈 앨런이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현재에까지 통용되는 '공식'을 확립시킨 일을 가리킬 뿐 실제 '재난 영화'의 효시를 꼽아보자면 이보다 훨씬 이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가장 오래된 예라면, 1913년 이태리의 치네치타 스튜디오가 만들어낸 <폼페이 최후의 날>을 들 수도, 영화사상 최초로 '타이타닉'호의 침몰을 담아낸 유얼드 앙드레 뒤퐁 감독의 <아틀란틱>('29)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역사'를 스크린으로 옮겨 다시 살펴보는 정도의 역할만을 했을 뿐, 실제 '재난'의 과정을 묘사하는 일엔 어느 정도 무관심 - 기술적 여건의 미흡도 큰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한 모습이어서 진정한 '재난 영화'의 효시라 보기엔 어려운데, 많은 비평가들이 '재난 영화'가 창생된 해로 1937년을 꼽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1937년에 등장한 두 편의 영화, 존 포드 감독의 <허리케인>과 헨리 킹 감독의 <인 올드 시카고>는 '재난 영화'의 장르화에까지 박차를 가하지는 못했어도, 적어도 '재난'이 상업적 요소가 짙은 스펙터클의 한 방향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시키기엔 충분했다. 한 탈옥수가 아내에게로 돌아가는 길에 '허리케인'이 일어 그의 귀향을 막아세운다는 설정을 담은 <허리케인>은 주인공 '혼자서' 겪는 재난의 과정만을 담고 있기에 '재난 영화'의 충족 요건을 채우지는 못하고 있지만, 1871년 실제 발생했던 시카고 대화재를 영화로 옮긴 <인 올드 웨스트>의 경우, 많은 부분 현대의 '재난 영화'와 유사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러나 '타인의 불행을 보며 즐긴다'는 '죄악스런 즐거움(Guilty Pleasure)' 개념이 아직 일반적인 '용인'을 받지 못한 시절이어서 영화 속 '재난'은 실제 있었던 일을 토대로 한 '재현성 드라마'의 영역에 국한되었고, 엔터테인먼트로써의 '재난'은 B급 SF영화의 세계로 흡수되어 수많은 졸속작들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전자의 경우로 눈에 띄는 성취를 꼽자면 철저히 사실에 입각한 다큐멘터리적 시선으로 '타이타닉'호 침몰을 그려낸 로이 워드 베이커 감독의 <기억해야 할 밤>('58)을, 후자의 경우로는 영국의 전설적인 장르영화 스튜디오 '해머'의 1961년작 <지구가 불붙은 날>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구가 불붙은 날>은 미소가 각각 남극과 북극을 향해 '동시에' 핵무기 실험을 감행해서 지구의 순환균형이 무너지게 된다는 가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인데, 이 과정에서 템즈강이 말라붙고, 사하라 사막에 홍수가 발생하고, 뉴욕에 급작스런 눈보라가 치는가 하면, 소련에는 토네이도가 일어 전세계가 이상기후에 시달린다는, 정말이지 현대 '재난 영화'의 모습과 놀라우리만치 유사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지구가 불붙은 날>을 필두로, <트리피드의 날>('61), <세상의 금>('65)과 같은, 독특한 아이디어를 지닌 B급 SF '재난 영화'들이 196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서서히 메인스트림 관객층을 확보하면서 메이져 스튜디오들마저도 이 무한한 상업적 가능성이 있는 소재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고, 이런 '관심'은 마침내 1970년대에 이르러 가시화되기에 이르렀다. 1970년대, '재난 영화'의 최전성기 '재난 영화' 붐의 시작을 알린 영화는 1970년에 공개된 조지 시튼 감독의 <에어포트>였다. 추락 일보직전의 여객기를 소재로 여객기 안의 패닉 상태와 이들을 구조하려는 구조진의 노력을 그려낸 <에어포트>는 1979년까지 모두 3편의 속편을 낳아, 초기적 프랜차이즈의 형태를 확립시킨 작품이기도 한데, 이보다 더 중요한 '영화사적' 업적이라면 '재난 영화'가 상업적 대성공과 함께 비평적 성공 -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과분한' 성과를 거두었다 - 까지도 거둬내는 모습을 보여줘, 장르의 진화와 확립에 가장 중요한 요소를 충족시켜 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에어포트>의 성공으로 인한 '붐'의 조짐을 가장 먼저 포착한 이는 <잃어버린 세계>('60), <해저 2만리>('61)와 같은, 명작 SF 소설을 블록버스터 감수성으로 소화해낸 초기형 블록버스터 제작자 어윈 앨런이었다. 그는 1972년, '타이타닉'호의 침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해저화산 폭발에 의해 배가 침몰한다'는, 더욱 자극적인 설정의 <포세이돈 어드벤쳐>를 발표해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뒀는데, 이어 제작한 '고층빌딩 화재'를 다룬 영화 <타워링>('74)이 <포세이돈 어드벤쳐>를 뛰어넘는 상업적/비평적 성공에 이르자 확고부동한 '재난의 달인(Master of Disaster)'으로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재난 영화' 공식의 형성에 있어 어윈 앨런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멀티 캐릭터'의 활용으로 다양한 재난의 양상을 각각의 등장인물을 통해 자연스럽게 소개하는 형식을 고안해냈고, '재난'이 영화의 끝무렵에 등장하여 마치 '데우스-엑스-마키나' 구성처럼 상황을 정리해 버리는 1930∼40년대의 트렌드 대신 1950∼60년대에 등장한 B급 SF 영화들의 '플롯 사이사이에 펼쳐지는 재난' 공식을 택해, '재난'의 크기와 강도로써 영화의 완급조절을 이뤄내는 색다른 형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결국 얄팍한 인본주의와 너덜거리는 멜로드라마적 상황설정이 어둡고 무거우며 거친 '재난'의 스펙터클에 균형성을 부여해 관객 호응도를 높인다는 사실을 알아낸 인물이기도 한데, 그가 이처럼 상업적인 목적으로 장르의 진화를 막아세워 하나의 '공식'을 고정화시킨 일은 훗날 그를 '장르의 창시자'임과 동시에 '최악의 장사꾼'으로 불리게끔 했다. 어찌됐건, 어윈 앨런으로 인해 가속화된 1970년대의 '재난 영화' 붐은 가히 광적인 상황에까지 이르렀었다. 하부 장르가 한 해에도 수없이 갈라져 나왔고, 기본개념에서 비껴나간 변종 장르가 등장하는가 하면, 장르 자체에 대한 '패러디' 장르까지 탄생되었던 것. '자연 재해'를 다룬 대표작 <대지진>('74)과 '동물 패닉' 장르의 시초 - <킹콩>('33)으로부터 시작되는, '괴수물'로 따로 구분되는 장르는 여기서 제외하기로 하자 - 인 <죠스>('75), <독충>('75), <스웜>('78), <피라니아>('78), '바이러스'에 의한 재난을 담은 <안드로메다 스트레인>('71), <카산드라 크로싱>('76), 유전자변이 재난담 <열외인간>('77), 혜성충돌을 그린 <메테오>('79), 인간에 의한 테러가 재난으로 어이진다는 내용의 <롤러코스터>('77), <시티 온 파이어>('79) 등이 쉼없이 시장에 쏟아져나왔고, 이 와중에 핵융합 버스가 각종 재난을 만나며 뉴욕에서부터 덴버까지 논스톱으로 직행한다는 '재난 영화 패러디' 영화 <빅 버스>('76)까지 등장하여, 바야흐로 '재난 영화'가 단순한 유행을 넘어서 사회현상화되는 상황을 연출해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동시다발적 밀어붙이기는 곧 관객들의 싫증과 환멸을 불러 일으켰고, 1970년대에 모든 라디오 스테이션에서 울려퍼지던 디스코 음악과 함께 '재난 영화'는 장르적 가치를 스스로 소멸시켜, 폴 뉴먼, 재클린 비셋, 윌리엄 홀든의 스타 캐스팅으로 이루어진 '화산폭발' 영화 <지구최후의 날>('80)의 대실패 이후, 결국 '추억의 집단히스테리 현상' 정도의 의미로 파묻히게 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재난 영화'의 극적인 부활, 그리고 현재 '재난 영화'에 대해 몇몇 비평가들은 1970년대의 지적이며 도회적인 '사회파' 영화들에 적응하지 못한, 저급문화에 목말라있던 지방 관객층을 중심으로 확산된 장르라 평가하고 있는데, 이런 면에서 봤을 때 '재난 영화'의 급작스런 '소멸'은, 1980년대에 이르러 메인스트림 영화 전체가 저급취향의 가벼운 선정주의 무드로 흘러, 동일 방향 내에서 비교적 많은 제작비가 투여되는 '재난 영화' 장르는 도태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도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ZAZ 사단의 <에어플레인!>('80)과 같은, '재난 영화' 공식을 비아냥거리는 영화들만이 흥행에 성공하고, 핵전쟁 이후의 상황을 리얼리스틱하게 담아낸 TV용 영화 <그날 이후>('83) 정도가 화제가 되었을 뿐 '재난 영화'는 마치 1950∼60년대의 '성서 스펙터클' 장르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진 장르로까지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런 '재난 영화' 빙하기를 처음으로 깨어부순 영화는, 다름아닌 스티븐 스필버그의 대히트작 <쥬라기 공원>('93)이었다. '동물 패닉' 장르의 영역에 크게 기대고 있는 이 영화의 성공은 예민한 제작자들의 촉각을 일깨웠고, 이것이 '바이러스' 소재의 '재난 영화'를 되살린 <아웃브레이크>('95)와 실화성 '재난 영화'인 론 하워드의 <아폴로 13>('95)을 거쳐 1996년, <트위스터>와 <인디펜던스 데이>의 어마어마한 성공으로 이어지자 마치 1970년대 초중반의 광경처럼 모두가 '재난 영화'에 달려드는 기현상이 일어나 버렸다. '터널 침하'의 인재를 다룬 <데이라잇>('96), 화산 폭발을 다룬 두 편의 영화 <단테스 피크>('97)와 <볼케이노>('97), 운석 충돌을 다룬 두 편의 영화 <딥 임팩트>('98)와 <아마게돈>('98), 산불 진압을 담은 <파이어스톰>('98), 폭우를 그린 <하드 레인>('98)이 불과 1, 2년 사이에 미친 듯이 몰려왔고, 마침내 이 모든 '재난 영화'의 완전 복권을 선포한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97)이 등장하여, 전세계에서 무려 18억달러를 벌어들이며 역대 영화사상 최대의 흥행 기록을 남겼다. 1990년대 중반에 일어난 새로운 '재난 영화' 붐은 1970년대에 등장했던 모든 방향, 모든 접근방식을 '그대로' 잇고, 여기에 그간 눈부시게 발전한 특수효과 기술을 덧씌워, '시각적 엔터테인먼트의 극한'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관객들에게 다가왔다. <스타 워즈>('77)로 대표될 수 있는 새로운 블록버스터 패러다임에 밀려 '구식'이 되어버렸던 '재난 영화'는 단순한 공식과 자극적인 소재, 시각적 경이를 무엇보다 추구하는, 사고체계가 일정부분 후퇴한 현대 관객들에 의해 되살아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1990년 말엽 이후로는 '재난 영화'의 인기도 한풀 꺾이고 제작 의지도 소강된 느낌이어서, 결국 독창적인 비젼이나 성실한 노력 없이 되살려낸 '시체'는 점차 부패하여 본모습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입증시켜 주고 있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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