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뜰한 가정주부가 시장에 갔다. 지갑에 10만원이 있었다. 시장 입구에 이르니 동네에서 명망이 있는 신사분이 다가오더니 한 마디 건넸다. “지갑에서 2만원을 주면 제가 당신보다 더 잘 시장을 봐드리겠습니다.” 점잖은 모습이 미더워 보여 2만 원을 건넸다. 그랬더니 가정주부가 원치 않고 별로 필요도 없는 물건만 여러 가지 사왔다. 가정주부가 내 자신이라면 나는 가정주부처럼 행동할까?

눈치가 빠른 사람은 짐작했겠지만 가정주부는 국민이고 신사는 정치인과 정부를 의미한다. 국민 개개인의 돈을 국민과 정부 가운데 누가 더 신중하고 꼼꼼하게 쓸 가능성이 높을까. 모두들 정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정부의 예산을 축소하고 세금을 줄이는 게 돈이 가장 알뜰하고 효율적으로 쓰이는 길이고, 궁극적으로 국가경제의 건강한 발전에 가장 좋은 전략이 된다.

지금 한국에서는 이러한 경제원칙이 무너지고 있다. 대표적인 게 문재인 정부가 3일 발표한 ‘예비타당성(예타) 조사의 심사기준 완화’다. 이번 발표는 ‘권력을 쥔 정치인과 정부가 예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국민 세금을 쓸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언론들도 해당 기사에 ‘세금낭비 방어막 무너졌다’ ‘정치권 외풍이 우려된다’ ‘선심재정 방지장치 무력화’ 등의 제목을 붙였다. 문재인 정부를 옹호하는 한 언론은 ‘비수도권 SOC(사회간접자본)사업 문턱 낮춘다’로 제목을 살짝 비틀어 해당 제도의 문제점을 가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지역구에 가면 ‘도로사업예산 100억 원 확보, 환경시설 50억 원 확보’ 등 정부 예산 따내는 것을 자신의 치적으로 자랑한다. 예산을 담당하는 정부 관료들을 만나보면 “그 사업 내가 챙겨줬어. 거기 축제 내가 10억 원 정도 밀어줬더니 나에게 잘해줘”라고 자랑을 한다.

돈의 출처는 분명히 국민 세금인데 마치 자신의 지갑에서 꺼낸 돈인 것처럼 행세한다. 시쳇말로 ‘돈 낸 사람, 생색내는 사람’이 다르다.
정치인(관료)은 속성상 돈 쓰기를 좋아한다. 특히 정치인은 자신의 임기 내에 돈을 펑펑 써야할 동기(인센티브)를 지닌다. 일단 돈을 써야 인기를 얻는다.

순진한(?) 지역 주민들은 세금은 누가 내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지역에 돈을 뿌려주는 사람에게 표를 준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이해찬 대표가 통영고성 재보궐 선거운동에서 표를 얻기 위해 “일자리 예산폭탄 통영 고성에 쏟아진다”고 말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세금은 돈 많이 번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기업과 열심히 일한 국민들이 냈는데, 생색은 여당 대표와 관련 정치인들이 모두 차지했다.

정치인들은 자기 임기 내에 돈을 아끼면 나라 금고는 튼튼해질지 몰라도 선거에서 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선거에서 지면 권력이 넘어간다. 자신이 아낀 돈을 상대방이 쓸 권리를 갖게 된다. 그러니 돈을 아낄 인센티브가 거의 없다. 특히 빚을 몽땅 진후 권력을 잃더라도 그 뒤처리는 다음 정부에 넘기면 그만이다. 실제로 많은 국민들도 누가 나랏돈을 헤프게 썼는지 원죄를 잘 따지지 않는다.

정부가 거둬들이는 세금은 민간에서 나온다. 그만큼 가계와 기업이 쓸 수 있는 돈이 줄어든다. 정부는 올해 세금부담률을 20.3%로 예상한다. 글의 첫머리에 언급한 것처럼 국민 지갑에 있는 돈 10만 원 가운데 2만원에 대한 사용권을 정부(정치인과 관료)가 갖는 것이다.

권력을 잡은 정치인과 정부는 세금이 부족하면 돈을 빌려 쓸 수 있다. 장래에 갚아야할 빚인 채권을 발행하는 것이다. 세금과 채권 발행을 통해 마련한 돈을 가지고 나라 살림을 방만하게 짜는 게 정치적으로 이득이다.

문재인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을 500조 원대로 높게 잡고, 아직 4월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일자리를 늘린다며 10조원 가까운 추경 편성을 밀어붙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겉으로는 ‘국민을 위하여!’이지만 속내는 ‘정치적 이득, 즉 내년 총선과 향후 대선 승리를 위하여!’인 셈이다.
세금을 걷거나 채권을 발행해 정부가 쓸 돈을 늘리면 여러 가지 폐해가 발생한다.

정부가 채권을 발행하고 어떤 사람이 그걸 샀다면 그는 민간 회사가 발행하는 채권을 사지 못하게 된다. 이럴 경우 민간 기업은 돈을 구하기 위해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야한다. 정부 채권과 경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결국 민간 기업들에 투자되는 돈의 양은 더 적어지게 된다.

재정을 늘리게 되면 돈이 정부가 보조하는 프로젝트들로 흘러가고, 사적인 영역에 투자돼야 할 돈이 줄어든다. 민간의 연구개발 자금이나 공장건설에 필요한 재원이 줄어 기업이 미래를 대비하기 힘들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 정치인과 관료는 국민 세금을 인기를 얻는 차원에서 허투루 쓰기 쉽다.

지난 2년간 일자리 예산 54조원이 어떤 결실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대표적인 사례다. 결국 방만한 정부의 재정 확대는 어린 미래세대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의 후손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예비타당성 심사기준’은 이처럼 정치인과 관료의 욕망과 헛발질을 막고자 도입된 나름 현명한 장치였다. 1999년 도입 이후 20년 간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역대 정부에서 비교적 잘 지켜왔다.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원칙을 무너뜨렸다. 문재인 정부의 구성원 즉 대통령, 청와대의 김수현 정책실장과 윤종원 경제수석, 기획재정부의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안일환 예산실장,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등이 해당 주역들이다. 사업성이 떨어지고 결국 세금 낭비할 수 있는 곳에 마구 돈을 써도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 역사에 길이길이 기록될만한 인물들로 보인다.

기업에서는 자금을 마구 낭비하면 배임횡령죄에 걸린다. 그것도 아니라면 최소한 이사회와 경영진에 의해 잘린다. 하지만 이번에 예타 심사기준을 완화한 인물들은 그러한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국민 세금을 쓸 권리를 마음껏 누리되 책임지지 않겠다’며 나중에 단죄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제도를 바꿨으니까.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므로 국가 재정도 결국 국민의 돈이다. 많은 국민들은 이번 예타 심사기준 완화로 자신의 지갑에서 돈이 제멋대로 나갈 가능성이 높아지는 데도 그러한 인과관계를 잘 모른다. 그러면서 지역이나 자신의 관련 사업에 예산만 배정되면 박수를 친다. 

국민의 무지를 이용하는 게 정치인인데 이처럼 ‘국민 우롱하는 정치인’을 좋아하는 안타까운(?) 국민들이 매우 많다. 국민 우롱하는 정치인과 정부를 국민이 잘 견제하는 나라들이 대체로 선진국이다. 반면 정치인과 정부의 돈 뿌리기에 앞뒤 가리지 않고 국민이 환호하는 나라를 ‘포퓰리즘 국가’라고 부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포퓰리즘으로 일관한 나라는 예외 없이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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