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시골에서 족보(族譜) 논쟁이 참 많았다. ‘뼈대 있는 집안’은 훌륭한 조상을 자랑했다. ‘족보도 없는 집안’은 모욕으로 간주됐다. 그런 상황을 두고 내공이 높은 어르신들이 한 마디 했다. “죽은 조상이 무슨 소용이야. 말이나 행실이 훌륭하면 양반이고, 하는 짓이 개차반이면 상놈이지!”

족보는 가문의 단합과 조상에 대한 공경이라는 유교적 가족관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유교적 입장이 담겼으니 아버지쪽 혈통만 따졌다. 족보를 기준으로 항렬과 촌수를 따져 집안 서열을 매겼다. 오늘날에는 가문의 중요성도 덜해지고 친인척이 모이는 일도 드물어지다 보니 족보는 점차 우리의 생활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기억도 아스라한 족보가 난데없이 뉴스로 나오고 화제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시민사회단체 간담회에서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말은 상당히 세계적으로 족보가 있는 이야기”라고 말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친절하게 친히 소득주도성장을 설명했다.

"원래 국제노동기구(ILO)가 오래전부터 임금주도성장을 주창해 왔었고, ILO가 주창한 임금주도성장은 많은 나라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우리가 임금주도성장이라 하지 않고 소득주도성장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다른 나라들은 대체로 임금 노동자 중심의 구조인 반면에 우리는 임금 노동자 못지않게 자영업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임금이라는 말로 다 포괄할 수가 없어서, 임금 노동자들의 소득과 자영업자들의 소득을 모두 망라하는 개념으로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것을 쓰는 것이다."

경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얘기를 듣고 ‘대통령의 인식이 정말 잘못 됐구나!’라며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스스로 ‘경제학은 과학’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표현은 엄밀한 의미에서 틀렸다. 수학과 물리학은 대체로 시대를 초월해 늘 부정할 수 없는 진리를 가르치지만, 경제학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므로 늘 시대와 환경에 따라 진리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위대한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이를 촌철살인의 문장으로 멋지게 표현했다. 케인즈는 왜 자꾸 자신의 말을 바꾸느냐는 질문에 대해 “사실이 바뀌면 저는 제 생각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떠신가요?”라고 반문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이 ‘족보 있다’고 하는 소득주도성장은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소득주도성장의 대표주자인 최저임금과 주52시간제는 한마디로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저임금은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2년 새 29.1%나 올랐다. 그랬더니 고용은 줄고 법 위반사례는 급증했다. 지난해 상반기에 최저임금 위반으로 사법 처리된 사례가 문재인 정부 출범 이전보다 38%나 늘었다. 최저임금으로 알바 자리는 줄고 자영업자들은 종업원 줄이기에 바쁘다. 지방의 경우 최저임금법을 지키려고 직원 없이 가족들이 모두 나서는 경우가 급격히 늘고 있다.

계도기간이 끝나 4월1일부터 본격 적용되는 주52시간제의 영향은 더욱 심각하다. 지난 2월 기준으로 종업원 300인 이상 대기업의 취업자 수는 245만9천명으로 주52시간제 도입 직전인 지난해 6월에 비해 19만6천명이 줄었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야근수당이 줄면 임금 보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니까 기업들은 아예 고용을 줄이고 가격을 올리는 방식으로 대응한 것이다.

주 52시간제의 더욱 큰 문제는 ‘지킬 수도 없고 지켜도 행복하지 않은 법’이라는 사실이다. 국내에서 IT분야나 게임 산업, 바이오 부문, 4차 산업혁명 분야의 업무 성격은 주 52시간제와 맞지 않는다. 생산성 향상방안은 마련하지 않은 채 물리적인 노동시간만 줄이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해진다. 기업은 생산을 줄이고, 근로자는 더 적은 임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소득주도성장 2년간의 성적표도 매우 나쁘다. 수출은 4개월째 감소해 이번 4월에는 7년3개월(87개월)만의 경상수지 적자가 예상된다는 얘기도 나온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없었던 일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통계청이 발표한 2월 산업활동동향에서도 생산은 전월대비 마이너스 1.9%, 투자는 마이너스 10.4%를 기록했다. 저녁에 식당에 가면 손님이 별로 없다. 경제지표가 이처럼 빨간불 일색인데 ‘소득주도성장은 족보가 있다’고 했으니 많은 국민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런 엉뚱한 말을 하도록 입력한 사람들은 아마 청와대에 있는 경제학자 출신 참모나 경제 관료들일 것이다. 경제학자인 헨리 해즐릿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이야말로 참 나쁜 경제학자(경제관료)라고 할 수 있다.

해즐릿은 이렇게 말했다. “나쁜 경제학자는 눈앞에 다가오는 것만 본다. 훌륭한 경제학자는 저편 너머에 있는 것을 본다. 나쁜 경제학자는 제안된 과정의 직접적인 결과만을 본다. 훌륭한 경제학자는 장기적이며 간접적인 결과에 주목한다. 나쁜 경제학자는 주어진 정책이 특정 집단에게 미치는 효과, 그리고 앞으로 미칠 효과만 본다. 훌륭한 경제학자는 그 정책이 다른 모든 집단들에게 어떤 효과를 미칠지를 탐구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매우 아끼는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도 지난해 11월 25일 페이스북에 “정치, 정책은 ‘결과책임(Erfolgshaftung)’을 져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국정 책임자는 ‘선한 의도’가 아닌 결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얘기다.

소득주도성장을 심하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한국 경제의 장송곡’이 될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소득주도성장은 한마디로 전혀 족보가 없는 ‘경제적 망상이자 경제적 도박’이라고 할 수 있다. 잠깐 생각하니 족보가 있기는 하다. 노동자들을 위해 최저임금을 대폭 올리면서 경제가 폭망한 베네수엘라, 최근 최저임금을 22%와 11% 올린 스페인과 그리스 등도 소득주도성장의 족보를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대한민국도 그런 나라를 닮고 싶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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