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이곳은 나에게 집이 아니다. 창문마다 둘러진 안전망은 감옥 같고 그 사람이 쓰는 침대는 성폭력을 위한 형틀로만 보였다”

이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9년간 성폭행을 당하며 살아온 한 여성의 수기 중 일부다. 위의 글에 나오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친아버지다. 이 여성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발간하는 ‘나눔터’라는 소식지에 지난해부터 친아버지로부터 당한 씻을 수 없는 상처에 대한 수기를 연재하고 있다. 水(수)라는 필명의 이 여성은 심한 폭력과 함께 수포로 돌아간 몇 번의 가출 끝에 결국 경찰의 도움으로 지옥 같은 집과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친부모, 친형제, 또는 친척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해 이뤄졌던 성폭력상담을 분석한 결과 총 2317건의 상담사례 가운데 가해자가 아는 사람인 경우가 83.5%를 차지했고 그 중 313건인 15.5%가 친족으로 나타났다. 이는 2004년 136건, 2005년의 212건에서 크게 증가한 수치다. 자신의 가족을 차마 철창에 가둘 수 없어 쉬쉬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임을 감안하면 그 수치는 더 커질 것이다.

한 경찰관계자는 “친족에 의한 성폭행은 대부분 집 밖으로 문제가 드러나지 않고 그 실태가 감춰져 있다”며 “드러나지 않은 근친의 성폭행 사례는 의외로 많다”고 밝혔다. 또 성행위에 대한 개념이 자리 잡지 못한 어린이들의 경우 애정표현과 성폭행을 구분하지 못해 범죄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아동기에 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A씨는 “아버지가 ‘사랑해서 그런거다’라는 말을 하며 성폭행을 했다”며 “성인이 된 후에야 아버지의 행동은 애정표현이 아닌 성폭행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라고 털어놨다.

한편,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를 살펴보면 친부와 형제가 18.2%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일촌사이에서 가장 빈번하게 성범죄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족에 대한 비뚤어진 복수심

자신의 혈육을 성폭행하는 인면수심의 파렴치한들. 전문가들은 특히 친딸을 성폭행하는 이의 경우 아내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을 약자인 딸에게 표출하는 성향이 짙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에는 기러기아빠가 친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줬다. 학원강사인 B(50)씨는 지난 2002년 아내와 고등학생인 큰 딸 등 가족 4명을 캐나다로 유학을 보내고 홀로 한국에 남았다. B씨는 자식들의 성공을 꿈꾸며 외로움과 경제적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매달 600여만원을 송금했다. 그러나 학원강사 월급은 네 가족의 외국생활을 뒷바라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B씨는 단칸방으로 내몰리는 신세가 됐다.
점차 가족들에 대한 서운함이 커가던 차 아내마저 이혼을 요구했고 이에 분노를 느낀 B씨는 16세의 큰딸을 국내로 불러들였다. 몇 년 만에 만난 아버지에게 살갑게 대하기는커녕 외박을 밥 먹듯 하는 딸을 보면서 B씨는 아내에 대한 복수심이 되살아났고 해서는 안 될 행각을 저지르고 말았다. 복수심으로 시작된 성폭행은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졌고 결국 자신의 친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하는 파렴치한이 되고 말았다.
결국 A씨의 행각은 딸이 어머니에게 고백을 하면서 들통 났고 도피생활을 하다 경찰에 붙잡혀 철창신세가 됐다. 아내에 대한 분노심과 자신만을 남기고 떠난 가족들에 대한 서운함이 인간이길 포기하는 행위로 표출된 것이다.

이처럼 매일 자신과 얼굴을 맞대며 생활하는 가족을 성폭행하는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일까.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 2005년 친족성폭력사례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충격을 금치 못하게 된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 214명중 성기삽입을 당한 경우가 무려 145명으로 67.8%를 차지했다. 이어 몸을 만져보는 추행을 당한 피해자가 17.8%, 성기접촉 9.3%, 도구를 사용한 이물질 삽입이 3.7%로 뒤를 이었다.
피해 장소는 집안이 대부분이었는데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집이 116건으로 54.2%, 피해자의 집이 19.2%, 가해자의 집이 9.8%, 여관 등 숙박업소가 1.9%로 나타났다.

도를 넘어선 친족 간 성폭력. 현행법은 어떤 처벌규정으로 피해자들을 보호하고 있을까?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의 법에서 친족에 의한 성폭력은 처벌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92년 김보은 사건이 발생하면서 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된 것이다. 김보은 사건이란 10년 동안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당시 21세의 김보은씨가 남자친구와 공모해 계부를 살해한 사건이다. 당시 사건을 접한 국민들은 존속살인이라는 사실보다 범행일체를 자백한 김보은양과 애인 김진관군을 통해 밝혀진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살해된 계부는 9세의 코흘리개였던 의붓딸을 성의 노리개로 농락했고 식칼과 쥐약을 항상 준비해 사실을 알릴 경우 온 가족을 몰살시키겠다는 협박을 일삼았다. 무려 10여년을 고통 속에 방치되었던 김씨는 결국 남자친구와 공모해 살인을 저질렀던 것.
재판장에서 김씨는 “구속된 후 감옥에서 보낸 7개월이 지금까지 살아온 20여년보다 훨씬 편안했습니다. 더 이상 밤새도록 짐승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됐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김양이 사건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란 점을 착안, 존속살인범에 대해서는 전례가 없는 집행유예 선고를 내렸고 이 사건을 통해 친족성폭행이 사회문제로 공론화되어 94년 성폭력범죄처벌법 제정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또 97년 국회를 통과한 성폭력특별법에서는 친인척의 범위를 4촌 이내 혈족과 2촌 이내 인척으로 확장했다.

또한 근친성폭력 피해자의 진술을 폭넓게 인정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와 친족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의 보호가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이는 자신의 의붓딸을 수년간 성추행하고 강간하려 한 혐의를 받은 이모씨에게 지난해 11월 내려진 판결이다. 1997년 12월부터 딸을 가진 여성과 동거한 이씨는 이듬해 9월부터 2004년 10월까지 약 6년 동안 의붓딸을 수시로 성추행하고 강간하려한 혐의와 동거녀를 폭행해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힌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당시 1심 재판부는 이씨에 성추행 및 강간미수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아 신빙성이 없기 때문에 유죄 증거로 삼기 어렵다”며 성추행과 강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고 폭행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이씨에게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 3부는 “피해자가 물적 증거나 목격자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수치스러운 피해 사실을 사실적·구체적으로 밝혔다”며 “진술 내용이 다소 불명확하거나 사소한 부분에서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진술의 신빙성을 특별한 이유 없이 배척해서는 안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허위로 진술할 만한 동기나 이유가 드러나지 않는 한 진술 내용을 배척한 원심의 판결은 경험칙과 논리법칙에 어긋나는 판단을 한 위법이 있다”며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파기 환송한 바 있다. 이 판결은 근친에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의 진술을 한층 폭넓게 인정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처럼 법은 피해자의 편에 다가서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피해당사자의 고통까지 치유하기는 어렵다. 누구에게 성폭행을 당하든 마찬가지겠지만 친족에게 성폭행을 당했을 때는 남성혐오, 우울증, 가출, 자살시도, 이혼, 약물복용 등의 후유증이 더욱 많이 나타나고 장기간 계속되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몇 가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친족 성폭행이란 비정상적인 가정에서나 일어나는 드문 일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 이 문제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터부시되는 일이라고 쉬쉬하며 숨길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로 끄집어내야 더 곪지 않는다는 것. 두 번째는 가해자를 위한 교정프로그램의 마련이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당하는 것보다 더 씻을 수 없는 고통이 피해자를 괴롭히는 만큼 특별한 교정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신체적, 정신적인 상처를 회복하고 정상적인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상담소 관계자는 친족성폭력의 경우 수년간 덮여 있다가 결혼할 무렵에 위기가 발생하는 것이 특징이라며 전문 상담기관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친족성폭행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가정 내에 있는 범죄기 때문에 한 가정 전체가 풍비박산 나는 경우가 많으므로 가족구성원 모두가 제 2의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상담을 받고 조기에 상처를 치유하는 것 또한 요구된다.

바로 내 가족의 문제가 될 수도

앞서 말했던 9년간 친부에게 성폭력을 당한 여성은 친족성폭력은 피해를 입은 사람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는 “주변에 혹시라도 나와 같은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을 보신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길 바란다”고 말하며 사회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문제임을 강조했다. 또 성폭행을 당한 기간이 길다고 해서 피해자들이 그 삶을 허용하거나 즐긴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실제로 친족에게 성폭행을 당해 경찰서이나 상담소의 문을 두드릴 경우 “그렇게 긴 세월동안 왜 빠져나오지 않고 당하기만 했는가. 결국 피해자도 즐긴 것이 아닌가” 라는 억측을 해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가해자 자신을, 피해자를, 그리고 한 가족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친족 성폭력. 가장 작지만 어떤 것보다 튼튼한 가정이란 이름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기 전에 모두의 관심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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