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 그 끝은 어디인가?

'메탈소재 정장…예쁜 손가방…당신은 쿨가이!' 모 의류업체의 광고 카피다. 언제부터인가 쿨한 문화가 한국사회를 덮고 있다. 세련되고 냉정하게, 그리고 가벼우나 천박하지는 않게... 집단과 이념의 지배가 효력을 다한 9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쿨족’들. 그들이 추구하는 소통방식과 인간관계는 무엇일까? 그리 옛날 애기가 아니다. 대학 캠퍼스에서 누군가 사랑 때문에 고민하다가 오랫동안 사라지고 난 뒤엔 “그 녀석 실연 때문에 자살 했다더라” 는 이야기가 이따금 들려왔다. 군대갔다가 변심한 애인 때문에 무장탈영한 군인의 이야기가 잊을 만 하면 뉴스거리로 TV에 나왔다. 좀 더 최근에는 “나 실연 당했는데 너무 힘들다”며 술독에 빠져 살거나 아니면 휴학하고 지방이나 외국으로 갔다는 애기가 캠퍼스 내에서 이따금씩 들려왔다 . 신세대, X세대, N세대를 거쳐 21세기의 젊은이들은? 요즘 실연당한 젊은이들의 보편적인 정답은 무얼까? 이별 뒤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거다. “너 정말 그런 일 있었어? 새까맣게 몰랐어.” 쿨 권하는 사회 바야흐로 우리는 ‘쿨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쿨’은 남녀관계뿐 아니라 가족·친구·동료·상사·선후배 등 모든 인간관계에서 현대인이 갈망하는 소통관계의 형식이다. 드라마도, 광고도, 거리에서 만나는 낯선 이들의 옷차림새에서도 ‘쿨’은 최고의 찬사다. ‘쿨’에는 ‘다른 사람에게 적당히 친절하되 감정적으로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에 대한 환상이 깃들어 있다.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cool’의 정의는 ‘어떤 경우에도 냉정함과 자기 조절능력 잃지 않기’ ‘너무 열렬하거나 친근한 모습 보이지 않기’ ‘감정의 기복 절제하기’다. 만약 거리에서 “쿨하다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좋다, 멋있다, 세련됐다, 유행에 맞는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쿨’이란 간단한 형용사에는, 냉정한·서늘한·뻔뻔한·침착한·훌륭한·가벼운, 그러나 천박하지 않은·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등의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열정과 감각을 필요한 순간에 발휘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자기 포장술’이라는 세련된 정의도 있다. 그렇기에 ‘쿨’이 가장 중요한 요소일 때는 뭐니 뭐니해도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절묘한 감정의 줄다리기가 불가피한 연애관계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는 사랑에 빠지지 않는 자기방어, 남에게 간섭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고도의 능력, 따라서 헤어질 때 울며불며 매달리지 않는 절제가 필요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주기는 하되 돌려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쿨’한 미소를 잃지 않는 인물은 근래에 인기리에 방영된 MBC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에도 등장한다. 풋내기 신입사원 남정은(정다빈)을 맘에 두면서도 그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선선히 봐주는, 그렇다고 상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훼방 놓거나 못살게 굴지도 않는, 한발 더 나아가 유학까지 보내 회사의 인재로 키우는 유동준 실장(이현우)이다. 극중 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 이현우도 ‘쿨 가이’의 아이콘과도 같은 존재라고 한다. 가수로서 명성도 얻었고 딸린 가족 없는 능력 있는 노총각에 하고 싶은 건 자유롭게 한다. 싱글족을 위한 요리집을 내 혼자 살면서도 어떻게 보면 화려한 싱글을 즐기는 문화에 일조했다. 그러나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경제적 능력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경제적 능력이다. 국내 모 호텔 국제마케팅팀에서 근무하는 조상욱(29)씨는 “쿨이라는 것은 외모와 옷차림을 타내는것 이라기 보다는 삶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쿨한 삶의 태도를 위해서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할 정도의 경제력과 정보화 시대의 이기들을 잘 활용하는 적응력, 남에게 해 끼치지 않을 정도만 일할 줄 아는 적절한 능력과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만약 경제력이 없고 별다른 직업이나 집안의 배경도 없이 후줄근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감정을 잘 정리하고 남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쿨하다는 말보다는 ‘대책 없다’ ‘소심하다’ 정도의 비아냥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쿨’이란 경제력이 없다면 유지되지 않는 삶의 품격인 것이다. 상품 이미지를 가장 잘 포장해야 하는 광고계에서도 ‘쿨’은 대세다. 광고계에서는 광고제작 과정에서도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때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서 쿨하냐 그렇지 않으냐를 따진다. 제품을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보이길 원하는 광고주들이 그렇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광고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톤 앤드 매너’(tone & manner)라고 하는데, 세련됨·모던함 같은 쿨한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은색·청색·회색 계통의 색조가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쿨’을 원하는 소비자들은 구구하게 설명하기보다는 ‘한눈에 척’ 오는 느낌을 원한다. 국내 모 광고대행사에서 최근 마케팅 기획조사를 벌였는데 어떤 때 광고를 선호하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세련될 때가 21.2%, 독특할 때가 20.3%, 심플할 때가 12.1%였다. ‘쿨’과 연관 있는 이 세 요소가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이른바 전통적인 요소인 ‘신뢰감을 줄 때’는 3.4%에 지나지 않았다. 냉정과 열정사이, 그 끝은 어디인가? 역사적, 그리고 사회적 특성상 집단주의 속에서 개인성이 사장되었던 한국사회에서 ‘쿨’은 허례허식과 과장, 명분과 관계의 집착이 강한 ‘어른들’의 풍토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요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에게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후지냐’는 질문을 자주 던진다. 돌아보면 ‘후진 사회’의 특징은 가족주의적 끈적거림과 군사주의적 의리, 식민지적 가식 같은 것이다. 이제는 각자가 생각한 바를 눈치 보지 않고 추진하는 것, ‘국민정서’라거나 ‘안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하냐? 남은 사람은 어떻게 할 거냐’라는 말로 채근해 물귀신처럼 끌어내리지 않고 가볍게 움직여야 할 때다. ‘근대적 집요함’은 복합적이고 이질적인 경험이 널려 있는 요즘 세상에서 병을 고치기보다 악화시킬 뿐이다. 이런 시대의 미덕은 선뜻 포기하는 것, 올 때 오고 갈 때 가는 것, 집착하지 않는 것, 상대의 의사와 감수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다원화된 사회의 다양한 시민들이 존중되는 질서를 만들어가려면 그전과는 전혀 다른 관계 맺음의 원칙과 감수성이 필요한데, ‘쿨’이라는 간단한 표현 속에는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쿨’은 동시에 집단이라는 보호막이 해체되고 노동이 유연화 돼가는 요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자 환상일지 모른다. 수면 위에선 우아한 미소를 흘리지만 물밑에선 열심히 물갈퀴를 젓는 백조처럼, 타인에게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속으로 삼키는 눈물은 얼마나 쓰라린가. 그래서 ‘쿨’은 자신을 종신토록 고용해주는 직장이나, 영원히 감싸주는 집단 또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현대인들이 무의식·의식적으로 발명해낸 감정의 조절 양식으로도 읽힌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를 보면 헤어진 후 우연히 마주칠때 마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태도를 취하는 두 남,녀 주인공. 그러나 그들의 냉정속에는 강렬한 열정이 숨겨져 있었다. 다시 사랑이 시작되는 그 두사람을 보며 냉정과 열정은 손바닥 하나 차이가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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