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들, 빨갱이가족 낙인에 회한의 세월 보내

유신독재시절의 흔적으로 현대사에 찜찜하게 남아있던 ‘인혁당사건’이 결국 무죄판결로 종지부를 찍었다.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여덟 명의 원혼을 달래줄 만한 법원의 결정이다. 32년을 눈물로 살아온 유가족은 물론 많은 국민들이 이번 결정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각계각층의 단체들과 시민들은 “피눈물로 살아온 유가족들의 끈질긴 싸움의 승리이자 인권의 승리”라 평하며 이번 결정을 반겼다. 정치권에서도 이번 판결의 정당성에 손을 들어줬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민주노동당은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의 명예가 마침내 회복됐다고 적극 환영했고, 한나라당 역시 유족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고 논평했다.

‘사법살인’이라는 이름으로 논란을 빚어 온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사건의 희생자 8명이 32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재판장 문용선 부장판사)는 지난 23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지난 1975년 긴급조치 1호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을 당한 우홍선씨 등 8명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무죄..또 무죄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당시 경찰 수사과정, 중앙정보부 수사과정에서 작성된 진술조서 등에 대해서는 혹독한 가혹행위와 고문, 장기간 구금과정에서 이뤄진 것이 인정된다”며 증거 능력이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군사법정에서 이뤄진 공판 조서에 보면 일부 피고인의 진술이 공소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 조금씩 있지만 그 자체가 앞뒤 모순되는 부분이 있어 신빙성을 인정하기 힘들어 유죄 증거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숨진 8명에게 적용된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 음모, 반공법 위반혐의에 대해 재심 사유가 아닌 사안을 제외한 모든 판단사안에 대해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인혁당 사건’이 조작됐음을 인정했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 불명예

인혁당재건위 사건이란 1974년 인혁당 관련자들이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국가보안법, 대통령긴급조치 위반 등)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후 고작 18시간 만에 처형된 사건이다. 그 후 인혁당 사건은 유신정권 시대에 자행된 사법살인의 대표적 사건이자 정치권력에 예속된 사법부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으로 손꼽혀왔다. 특히 사형확정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해 재심기회마저 박탈해 스위스 국제법학자협회로부터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는 비평을 받기도 했다.
사건이 일어난 뒤 30여년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져 있던 인혁당사건은 지난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당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고문과 피의자 신문조서 및 진술조서 위조 등을 통한 중정의 조작극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유족들이 그해 12월 재심청구를 냈고 몇 년간의 지리한 싸움 끝에 지난 23일 무죄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빨갱이가족’ 멍에 짊어지고 32년

재심선고가 열린 지난 2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법정은 유족과 몰려든 취재진들로 120석이 꽉 찼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초조한 모습을 보이던 유족들은 무죄선고가 나옴과 동시에 묵혀둔 원한을 풀 듯 눈물을 쏟았다.
피해자 중 한명인 하재완씨의 부인 이영교씨(72)는 “지난 30여 년간 쌀알을 모래알처럼 씹으며 남편의 넋을 달랬다”며 “진실은 살아있고 정의에는 뒤따르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고 통한의 세월을 회고했다.
유족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혀 살아가는데 많은 부분에 제약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가난과 주변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을 견디며 고통의 세월을 살아 온 것.
이 같은 아픔에 대해 국가는 금전적인 부분으로 보상을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이번 사건에 국가가 짊어져야 할 배상액수는 역대 최대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최근 법원이 독재정권 시절에 국가가 자행한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크게 인정하는 사례로 미뤄볼 때 억측은 아니라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유가족 45명은 이미 지난해 11월 국가를 상대로 34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낸 바 있다. 유가족은 손해배상뿐만 아니라 형사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받을 수 있다. 이는 구속기소 됐다가 법원에서 무죄선고가 날 경우 구속기간만큼 보상해 주는 제도다. 이를 종합해 볼 때 보상금이 얼마가 될지에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은 이번 사건으로 된서리를 맞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이번 사안에 대해 어떠한 언급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박근혜 의원을 향해 비난의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다.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은 유족들이 박근혜 의원에게 사과를 요구한 것에 대해 “부친의 일이고 박의원의 대학시절에 일어난 일이지만 부친의 문제를 도의적으로 사과할 기회가 있으면 사과 하는게 옳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아울러 홍의원은 “박 전대통령의 과실에 대한 부분은 국민에게 사과하는 것이 맞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박의원 측의 입장은 강경하다. 박의원에게 책임을 묻는 건 연좌제라는 것. 친 박근혜 계열의 이혜훈 의원은 “부모의 문제가 딸과 아무 상관없다고 얘기하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부모의 모든 잘못에 대해 딸이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아니다”며 “여당의 모 지도자들의 조상들이 어쩌느니 말들이 많은데 그분들도 국민 앞에 석고대죄 해야 하나?”라고 반발했다.


한편 경찰은 이번 사건의 항소여부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 경찰이 고민하는 이유는 고인과 유가족의 고통이 연장될 것을 우려해서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고통을 안고 인내한 유가족에게 또 한번의 송사는 너무 버거운 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론과 시민단체의 반발이 뻔히 예상되 앞으로의 행보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이다.

끝이 아닌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일 뿐

이번 인혁당 무죄 판결은 끝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인권과 정의를 위한 작은 디딤돌일 뿐이다. 아직도 진상을 규명하지 못한 억울한 사안이 부지기수고 과거 내란음모 및 간첩 조작사건 등에 대한 재심 및 관련 소송도 잇따를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인권과 정의의 승리라 평가되는 이번 판결. 앞으로의 과거청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김봄내 기자 soc04@sisafoc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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