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300호에 비친 대~한민국

지난 2000년 ‘일요뉴스’란 제호로 고품격 정통 시사주간지를 발간한 이후 ‘주간뉴스’ ‘시사신문’으로 거듭 제호를 변경해가며 국민들의 눈을 만족시켜왔던 ‘시사신문’이 지령 300호를 맞이했다. 창간호가 발간된 이후 7년이라는 세월이 지면 구석구석에 가득 묻어왔던 것이다.

본지에서는 창간이후 본지에서 다루었던 주요 기사들과 함께 잊혀져간 그 시대를 다시 되 짚어보면서 ‘시사신문’ 지령 300호를 재조명 해본다.

21세기의 첫 발을 내디딘 지난 2000년 5월 본지는 당시 ‘일요뉴스’란 제호로 정통시사주간지를 창간했다. ‘공정한 보도·깨끗한 언론·건강한 사회’를 모토로 내걸고 당시 일간신문이 주를 이루던 신문업계에 타블로이드 형식의 정통시사주간지로서 새로운 언론문화 창달에 첫 걸음을 뗀 것이다.

2000년 6월 ‘주간뉴스’로 제호를 변경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사회전반에 걸친 각종 현안들을 폭넓은 시각과 심도 있는 분석으로 주간지에 걸 맞는 발굴, 취재 기사들을 개제해왔다.

‘시사신문’으로 다시 제호를 변경하며 제2의 도약기를 열었다. 황금돼지해라는 정해년 새해 첫 달에 지령 300호를 맞은 ‘시사신문’은 보다 깊은 분석기사와 알차고 유익한 읽을거리로 400호, 500호를 향한 정통시사주간지로서의 면모를 더 해나갈 것이다.

2000년 창간 이후 300호를 맞기까지 지난 7년 동안 ‘시사신문’의 지면을 장식했던 주요기사들을 간단히 간추려보기로 한다.

1. 제5호 2000년 8월 6일자 ‘제2의 IMF 적신호 켜졌다’

전국이 IMF 한파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지난 2000년. 본지는 TN소프레스와 공동여론조사를 통해 국민들의 체감경기를 기사화 했다. 당시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지역의 일반 시민 500명을 직접 설문조사 방식을 통해 신뢰도 95% 수준을 기록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던 것이다. 당시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제2의 IMF가 올 것이다’는 답변이 53.7%에 달하는 등 2000년 당시의 국민경제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2. 제26호 2001년 7월 16일자 ‘노사분규 해결사로 나선 용역깡패들’

서민경제가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각종 노사분규가 끊일날이 없었던 것이 2001년이었다. 특히 당시 정부당국이 공권력 투입에 부담을 가지면서 노사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고 결국 사측의 선택은 바로 ‘구사대’로 이어졌다. 본지는 당시 S그룹 울산공장 파업현장 등의 현장취재를 통해 구시대의 유물이나 다름없는 용역깡패들로 구성된 구사대의 파업현장 투입 등 생생한 현장리포트를 기사화했다.

3. 제51호 2002년4월21일자 ‘이회창 필패론’

이변이 속출했던 지난 2002 대선을 7개월 앞둔 2002년 4월. 당시 대세론을 앞세우며 여당후보를 압도적인 지지도 차이로 앞서나가던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의 대선 필패론을 기사화 했다. 그해 12월 치러진 대선에서 이 전 총재는 노무현 현 대통령에게 다시 고배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고, 본지의 ‘이회창 필패론’은 시사주간지가 갖추어야 할 정확한 분석기사를 7개월 전에 내보낸 결과를 가져왔다.

4. 제74호 2002년 10월 3일자 ‘미군 고의적 살인 드러나’

2002년 막바지 전국을 충격에 몰아넣은 미군의 ‘미선이·효순이 살해사건’에 충격적인 증언이 나왔다. 본지는 당시 커다란 사회적 이슈로 불거진 ‘미군 여중생 살해사건’과 관련 육군기갑학교 출신의 이기환씨와 단독 인터뷰를 통해 현장을 치밀하게 재구성 했다. 이씨는 월남전 장갑차 파견대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장갑차·탱크 조종전문가. 이씨는 당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미군 여중생 살해사건은 여중생 2명을 압살한 후 전, 후진을 반복해 확인압살까지 자행한 잔인한 살인”이라는 충격증언을 하기도 했다. 이씨의 이같은 증언은 당시 여중생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에서 중요한 근거로 채택되기도 했었다.

5. 제96호 2003년 2월 23일자 ‘대구지하철 방화사건 공포의 1분’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5분. 성수대교 참사 이후 초대형 참사로 꼽힌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이 벌어졌다. 한 개인의 불특정 다수를 향한 사회적 불만이 커다란 대형 참사로 이어진 어이없는 사건이었지만 국내에서 만연하고 있는 ‘안전불감증’을 새삼 깨닫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불과 1분 사이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초대형 참사로 기록된 ‘대구지하철 방화참사’ 이후 국내 대중교통 안전 환경은 차츰 진화했지만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6. 제97호 2003년 3월 2일자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파행운영 2년째’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박진탁 상임이사의 업무상 횡령, 배임사건 이후 2년 동안 표류해오던 실태를 되짚어 봤다. 특히 박 전 상임이사의 위법 사실이 드러난 이후에도 적립후원금 횡령 비리가 계속 드러나는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던 재단법인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쳐 봤다. 결국 조영인 낮은자 교회 담임목사를 위원장으로 한 비상대책위가 구성되고 비대위 대표들의 삭발식 등 장기기증운동본부 정상화를 위한 행보가 시작됐고 파행을 거듭해오던 장기기증운동본부는 서서히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7. 제98호 2003년 3월 9일자 ‘노무현의 新 언론만들기’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언론과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나섰다. 노 대통령의 이러한 언론기조는 이미 임기초부터 시작돼 왔었던 것. 집권초기부터 언론개혁의 기치를 올렸던 노 대통령은 정부부처 기자실 통합 등 대 수술을 감행했다.

결국 노 대통령의 최근 언론 관련 행보는 이미 이전부터 기획돼 있던 ‘新언론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부였고 본지는 대통령 취임 초기 이같은 맹점을 냉철히 분석, 보도하기도 했다.

8. 제292호 2006년 12월 3일자 ‘넘버 투 딱지, 쉽게 떼는 게 아냐’

차기 대선을 앞두고 한때 부동의 지지율 1위를 고수해오던 고건 전 총리가 돌연 대권가도에서 이탈했다. 비록 30%대 지지율이 10% 포인트대로 하락했지만 고 전 총리의 위치는 여권내부에서 가장 유력한 차기 주자로 꼽히곤 했었다. 이러한 그의 대권후보 전격 사퇴는 여권으로선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고 전 총리의 지지자들로 인해 사퇴 기자회견을 갖지도 못 할 정도로 커다란 파장을 불러오며 그의 사퇴소식은 2007년 정계 핫뉴스로 떠올랐다.

본지는 이미 지난해 연말 심도 깊은 분석을 통해 고 전 총리의 위기설을 제기한 바 있다. 결국 본지 보도가 있은 지 1개월 만에 고 전 총리는 대권가도에서 내려서고 말았다.

9. 제293호 2006년 12월 10일 ‘김정일도 미군 철수 원하지 않는다’

지난해 11월 30일.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본사가 후원한 조선대학교 특강에서 국민의 정부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 자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기본적으로 ‘미군철수를 원하지 않는다’라는 충격발언을 한 사실을 전격 공개했다. 당시 김 위원장은 ‘통일 이후에도 미군 주둔은 필요하다’라는 김 전 대통령의 말에 ‘주한미군 철수는 국내용(북한 내부용)’이라는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고 밝혔다. 본지는 그동안 ‘독도지키기 운동’의 일환으로 독도에 이순신장군 동상 건립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한 대표는 이날 동참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10. 제298호 2007년 1월 14일자 ‘폐염산으로 만든 4천만의 밥상머리’

정해년 새해 벽두 본지가 특종보도 한 ‘폐염산으로 만든 김’ 기사는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유기산 공급업체들과 일부 어촌계장들이 결탁한 사건은 온 국민의 기호식품이자 그 수요가 날로 늘어나고 있는 ‘김’이라는 먹을거리에 폐염산을 사용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업체와 일부 양식업자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검은 커넥션을 까맣게 모른 채 4천만의 밥상에 오르는 ‘폐 염산으로 만든 김’은 충격적이었고 결국 광주지방검찰청 해남지청은 판매업체 대표와 어촌계장 등 모두 6명을 구속하고 29명을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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