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은 꽉 막힌 북미 간 비핵화 협상에 중재자를 자처하며 수차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 양측 사이에 물꼬를 트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미북 양국은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와 제재 해제 등을 각각 요구하며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네 차례, 다섯 차례 만난다고 해도 과연 가시적 진전이 있을 수는 있는지, 소위 ‘중재 역할’에 대한 회의적 시선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인데, 도리어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은 중재자로서 필요한 본연의 중립적 태도를 잃고 점차 한 쪽으로 경도되는 모양새여서 기대는커녕 우려만 한층 깊어지고 있다.

애당초 극도의 긴장상황을 촉발시킨 원인은 북핵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북한이 진정으로 비핵화 의지를 갖고 있다면 한반도에 ‘핵 공포’ 원인을 제공한 책임을 지고 과감하게 핵리스트 제출과 모든 시설을 공개하는 등 전면적으로 솔선하는 조치를 보여줘야 마땅하나 아직도 자신들이 보유한 핵무기를 과거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협상카드로 활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국제사회의 의구심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도 수차례 강조했듯 한반도 비핵화를 갈구한다면 이처럼 소극적으로 나오는 북한을 확실하게 돌려 세울 수 있도록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를 선행케 하는 데 우선 방점을 두고 김 위원장을 설득했어야 하지만 최근 행보를 보면 문 대통령은 비핵화보다 북한이 요구해온 제재 해제 쪽에 더 무게를 두는 것 같은 모양새다.

오죽하면 평양에서 열린 3차 남북정상회담 직후 미국을 찾아 유엔 등에서 활동한 문 대통령의 행적을 두고 블룸버그 통신에선 “문 대통령이 유엔에서 김 위원장의 최고 대변인이 되었다”고 평하기까지 했겠는가.

이 같은 모습은 이번 유럽 순방 자리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는데, 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 지역으로 거론되고 있는 유럽을 먼저 찾은 문 대통령은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적어도 북한의 비핵화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왔다는 판단이 선다면, 유엔 제재의 완화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더욱 촉진해야 한다”며 북한의 비핵화 조치 쪽에 더 무게를 둔 마크롱 대통령과 일부 온도차를 보였다.

염불보다 잿밥에만 관심 있듯 조속한 비핵화 조치부터 시행하기보다 제재 완화를 비핵화 진행의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있는 북측 태도를 그대로 반영한 듯한 문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북핵 문제 주요 당사국 중 하나인 미국을 자극하고 있는데, 이미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 완화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동맹이라는 한국까지 자칫 경솔한 신호를 줄 수 있는 ‘제재 완화’란 의제를 벌써부터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문 대통령이 비록 조건부이기는 해도 프랑스와 영국 등 다른 안보리 국가를 방문해 대북제재 완화에 협조해줄 것을 당부하는 모습은 마치 미국만 ‘선 비핵화’란 주장을 펴는 것처럼 고립시키는 구도로 몰고 가려는 듯 비쳐져 미 정부로부터 직접적인 경고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미 국무부는 15일 남북 고위급 회담을 통해 남북 간 철도, 도로 연결에 합의한 데 대해서도 “남북관계 개선은 북한 비핵화와 별개로 진전될 수 없다”며 사실상 제동을 걸고 나섰는데, 앞서 지난달 미 재무부도 국내 은행들과 접촉해 전화회의를 하면서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하지 말라”고 강한 어조로 우려를 표명한 바 있는 데 비쳐 문 대통령의 이런 행보를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경고로 풀이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은 여전히 올해 안으로 남북 철도·도로 연결 착공식을 강행하는 것은 물론 김 위원장이 요청한 대로 교황에게 내년 초 방북을 제안할 것으로 알려져 일견 ‘평화 분위기’만 조성하는 형태로 비핵화란 본질을 물타기하려는 건 아닌지 국제사회의 걱정 어린 시선이 늘어가고 있다.

이미 미 정부는 최근 대북 제재 리스트에 ‘제3자까지 제재’하는 조항인 ‘세컨더리 보이콧 위험’이란 문구를 새로 넣었을 만큼 이전과 달리 점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데, 이처럼 변화된 기류를 감지하지 못한 채 문 대통령이 북미 협상의 한 축인 미국의 목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향후 비핵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일어날 모든 후폭풍과 책임을 김 위원장 뿐 아니라 본인도 함께 떠안게 될 수 있음을 재삼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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