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로 자존심이 상해 뛰쳐나가는것으로 시작

경찰청 조사 결과 지난해 집을 나간 성인은 4만7000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IMF 외환 위기 때인 1998년에 비해 거의 배로 늘어난 수치다. 왜 그런지는 대단히 복합적이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가구당 평균 부채가 2900만원을 넘어 99년 말에 비해 배가 늘어났다는 한국은행의 조사와도 거의 일치하는 수치다. 집 나가는 어른들이 늘고 있다. 가출한 자녀를 기다리는 부모보다 집 나간 부모를 애타게 기다리는 청소년들이 세 배 이상 많은 게 지금의 현실이다. 이유도 카드빚 독촉 등 경제적인 것에서부터 가정폭력, 자아실현 욕구까지 다양하다. 그냥 이것저것 다 싫고 귀찮아서 나간다는 사람들도 상당수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해 가출한 만 20세 이상 성인은 모두 4만7천2백54명(실종자 제외)으로 전년도 4만5천6백34명에 비해 3.5% 증가했다. 성인 가출은 1998년 2만5천1백70명 이후 해마다 급증, 1999년 3만1천9백6명, 2000년 3만9천6백28명을 기록한 뒤 2001년에는 4만 명을 넘어 4만3천43명에 달했다. 가출자 수는 경찰에 신고된 사람만 집계했기 때문에 실제는 경찰 집계를 크게 웃돌 것으로 보인다. 반면 청소년 가출은 1998년 1만5천3백16명을 기록한 뒤 해마다 1,000명씩 늘었지만 2002년에는 1만4천8백65명으로, 지난해에는 1만3천3백74명으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심각한 사회 문제로 제기됐던 청소년 가출은 2002년을 고비로 어느 정도 잠잠해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어른들의 가출은 급격하게 늘고 있는 셈이다. 가출자 수는 경찰에 신고된 사람만 집계됐기 때문에 실제 가출한 사람 은 경찰 집계를 크게 웃돌 것으로 보인다. 경찰 관계자는 "생계형 절도가 늘어나는 데서 보듯 경제적 어려움과 이혼율 증가에 따른 가정불화 등이 주된 가출 이유"라고 설명했다. 김혜란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단지 외환위기에 따른 문제로 설명하기에는 지금까지 성인 가출자가 계속 증가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며 "신용불량자 양산이 더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직업별로는 무직자·주부·회사원 順 경찰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집나간 어른들의 가출 동기는 부부싸움 등으로 인한 가정불화가 1만869명으로 가장 많았고, 불륜 등 남녀관계(2093명), 정신질환(1787명), 배우자의 무책임(1597명), 가난(1196명) 등의 순이었다. 연령별로는 30대가 1만4582명(31%)으로 가장 많았고 20대(1만3058명), 40대(9915명)가 뒤를 이었다. 직업별로는 무직자(1만3533명), 주부(1만2286명), 회사원(3655명) 순이었다. 특히 가출한 뒤 끝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은 미귀가자는 1만6881명으로 1년 전(1만912명)보다 6000명 가까이 늘어났다. 이런 흐름은 올해도 지속되고 있다. 올 들어 5월31일까지 경찰에 신고된 성인가출자만 1만9931명. 하지만 이 수치도 모든 가출자를 포함한 것은 아니다. 경찰 집계는 적극적으로 가출자를 찾으려는 가족들의 신고 건수만 더한 것이기 때문이다. 카드빚이나 가정불화 등으로 가족이 가출한 경우 대부분 신고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 가출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남성의 전화 이옥 소장은 이에 대해 “요즘은 가출이 유행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심지어 일부 가출자들은 수천만 원씩 카드빚을 지고도 시치미를 떼고 있다가 차압이 들어오기 직전 가출해버려 남은 가족들을 황당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출했다고 해서 그들 앞에 편안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간혹 ‘편안한 삶’을 위해 집을 버리는 화이트칼라 가출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가출자들은 여인숙이나 친구집을 전전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 가출 여성들이 흔히 가게 되는 곳은 노래방이다. 이들은 ‘노래방 도우미’로 취직해 노래를 불러주고 술시중을 들면서 생활을 꾸려나간다. 남자들은 결혼 전 본가나 고시원, 회사 사무실, 승용차 등에서 산다고 한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L씨(49)는 “지속되는 경기 불황으로 사업이 어려워진 후 아내로부터의 늘 지속된 폭언과 폭행을 당해 가출했다”며 “아이들이 보고 싶고, 집 밖 생활이 힘들어 집에 들어가고 싶지만 아내가 무서워 집에 못 들어가고 있다”고 호소했다. 사실 남자들의 경우 여자들보다 불심검문에 걸리는 경우가 많고 예비군이나 민방위 훈련 등 걸리는 문제도 많아 가출과 도피 생활이 쉽지 않다. 통계에도 나타나듯 30, 40대는 위험한 시기다. 가정에 권태감을 느끼기 쉽고 경제적으로 전환기를 맞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남성은 40대 초반, 여성은 30대 후반이 위험한 연령이다”며 “이 시기를 잘 보내야 행복한 노년을 맞이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가출은 이혼으로 연결되는 수가 많아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상담 건수의 9.6%인 428건이 배우자 가출로 인한 이혼상담, 부양의무 청구 등에 대한 문의였다. 특히 남성 상담자의 23.5%, 여성 상담자의 7.3%가 배우자 가출 때문에 상담을 의뢰한 경우였다. 이처럼 성인가출은 이혼의 단초가 되거나 부모 모두의 가출로 이어져 소년소녀 가장을 양산한다. 또한 이러한 가정의 자녀들은 생계 문제 혹은 정서적인 이유로 학업을 포기하고 부모처럼 가출하는 경우가 많아 결국 가정해체를 가져오고 사회문제로 확대된다. 대개 가출의 시작은 사소한 일로 자존심이 상해 뛰쳐나가는 경우 성인가출의 경우 본인의 의사로 귀가하지 않는 한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가족들을 안타깝게 한다. 또 가출신고를 해도 청소년과 달리 경찰이 적극적으로 가출자들을 찾아다닐 수 없는 형편이다. 가출은 문제의 해결점이 아니라 오히려 일을 더 복잡하게 하는 수가 많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유경애 상담위원은 “남아 있는 사람들은 황당할 뿐이다. 잘잘못을 떠나 당장 생활상의 불편은 말할 것도 없고, 버림받았다는 느낌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는다. 결국 가정은 해체되고 만다고 말했다. 대개 가출은 사소한 일로 자존심이 상해 뛰쳐나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화해할 구실이 생기지 않으면 바로 이 자존심 대결 탓에 문제를 해결하기가 더 어려워지기도 한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로 가정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가출은 문제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문제는 집 안에서 풀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충고한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을 수 없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가정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다. 가정은 자신의 문제를 더 꼬이게 하고 힘들게 하는 문제의 원천이라고까지 말하는 이들도 있다. 시대의 변화를 가정이 따라가지 못하는 데서 오는 갈등이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 이상적 가정과 현실의 가정 사이에서 갈등하다 가출을 결심하는 경우가 많다. 집나가는 어른들로 인해 소년소녀 가장 양산 등의 심각한 사회문제 발생 전문직에 종사하는 30대 중·후반 부유층 남성들 중에 아무 이유 없이 집을 나가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집이 위로가 안 되기 때문에 나간다고 말한다. “집에 오면 아이 봐줘라. 집안일 거들어라. 담배 피우지 마라. 온갖 잔소리에 오히려 피곤해진다. 혼자 살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항변이다. 집에는 생활비를 두세 달 정도 송금해주다가 연락을 끊기도 한다. 그런 경우 대부분 결말은 이혼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가출의 양상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이전에는 가출의 원인이 주로 가정폭력이나 남편의 불륜이었다면 요즘에는 카드빚이나 삶의 스트레스, 자아실현 등 더욱 다양해졌다. 양정자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원장은 “성인가출 유형이 다양화하면서 옛날에 없던 새로운 양상들이 드러나고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가부장제하에서의 이중적 의식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어떤 경우에든 남성이 경제적 책임을 떠맡아야 하고, 여성은 가사와 아이들 교육을 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된다. 사회가 변하면서 이런 역할이 뒤바뀌기도 하고 서로 역할을 분담하기도 해야 하지만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아내가 돈을 벌고 남편이 가사를 맡는 식의 역할 분담도 이뤄져야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자존심 싸움을 할 경우 가출이나 이혼으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가출은 가부장제 사회라는 ‘새장’에 갇혀 힘겹게 살아가는 성인 남녀의 처절한 몸부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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