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아직 1년 이라는 시간은 길다”

사상 초유의 탄핵정국 맞이한 대통령···초지일관으로 버텨
지지율 답보상태 빠진 盧, 1년 남은 임기 안에 반등하려나?
퇴임 후에도 정치하고 ‘대통령 은퇴문화’ 새롭게 모색할 것


▲ 노무현 대통령.
민주개혁세력의 힘을 등에 업고 등장한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 그의 퇴임도 이제 1년이란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벌써부터 언론에선 그의 퇴임이후의 행보와 역할에 대한 기사를 다루는 등 레임덕 대통령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4년 전 그를 통해 실현되기를 바라는 시대적 과제, 국민적 염원을 통해 탄생했다. 즉, 개인의 능력보다는 사회양극화 해소와 미국에게 당당한 외교 등을 바란 국민들의 시대적 요구에 의해 당선됐다는 말이다.

그로부터 4년 후 지금은 어떠한가. 국민들의 대부분은 참여정부는 그간 세 번의 문민정부중 가장 실패한 정부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여론조사를 보면 극명히 드러나는 결과들이다. 정치권의 한 유력인사는 “시대적 과제 중 어느 것 하나도 손대지 못한 그런 문민정부로 기록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물론 노 대통령의 업적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탈(脫)권위주의를 지향했고, 그렇게 만들고야 말았다. 또한 부정부패 등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앞세운 일련의 국방개혁 추진, 한·미동맹 변경 시도, 일방통행식 대북 포용정책, 부동산 세금폭탄 세례, 낙하산 코드인사 등을 통해 권위주의가 사라진 자리를 그보다 훨씬 해로운 아집과 편견, 독단, 만용이 꿰차고 앉은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불가능해보였던 것들을 가능으로 바꿔 대통령으로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 그러나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중심에 놓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아집과 편견으로 시대적 과제와도 멀어지고 국민적 염원도 건너 뛴 대통령으로 남게 될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의 정치인생은 1988년 통일민주당의 공천 제안을 받고 부산 동구에 출마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민정당 후보로 나온 허삼수씨를 누르고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


초지일관으로 버틴 정치인
그의 의정활동은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국회의 대정부질문, 노동위 등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 노동위에서는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활약은 ‘5공비리조사특위’의 청문회 활동에서 정점에 치닫는다. 당시 정주영, 장세동 씨 등에 대한 증인 신문에서 핵심을 찌르는 질문과 날카로운 추궁을 보여줌으로써 일약 청문회 스타로 부각된 것. 이는 그를 대중정치인으로 만들어놓는 기반이 됐으며 아직도 그를 ‘청문회 스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이다.

1990년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김영삼 당시 민주당 총재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심정으로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손을 잡은 것. 노무현의 입장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무리 호랑이를 잡으려한다고 해도 여소야대를 뒤엎고 지역분열을 조장하는 1990년 1월의 3당 합당에 따라갈 수많은 없었던 것. 그는 극렬히 반대해 당 잔류를 선언했다.

이후 민주당 내에서 일관되게 신민당과의 야권통합운동을 전개, 마침내 두 당은 1991년 9월 통합민주당을 출범시키게 됐고, 그는 첫 대변인으로 활약하게 된다. 일신의 안일을 버리고 대의를 선택한 결정이었지만, 이후 낙선 등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통합민주당의 간판으로 노무현은 92년 3월 14대 총선에서도 다시 부산 동구에 도전하지만 이번에는 민자당으로 당적이 바뀐 허삼수씨에 패배,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낙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92년 12월의 대선에서 물결유세단 단장으로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다음해인 93년 3월 전당대회에서는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당선되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99년 초 다시 지역갈등을 악용한 집회가 이어지자 노무현은 다시 종로 지역구를 포기, 부산행의 결단을 내렸다.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 많은 지지자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해 또다시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했다.

이를 계기로 그를 아끼는 전국의 지지자들과 네티즌들이 모여 한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했다. 노사모의 자발적인 태동은 국민참여를 통한 정치변화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예견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이다.


탄핵의 고통 겪은 대통령
노무현은 2002년 3월9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에서 치러진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당당히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됐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노무현의 당선은 ‘개혁과 통합’을 원하는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로 가능했고, 국민대권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노무현의 선거운동 방식은 전통적 선거캠페인 방식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돈, 가신, 계보, 측근 없는 정치를 펼쳐 온 노무현은 국민이 후원금을 내고 대통령 후보를 지원하는 방식을 공개적으로 요청,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60억 원 이상의 국민성금을 모았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전과 선거운동 마지막 날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파기 선언으로 인해 선거의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노무현 후보를 더욱 확고히 지지했다. 결국 노무현은 48.9%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인생은 평탄치 많은 않았다. 2004년 1월 5일 새천년민주당의 조순형 대표가 노 대통령 탄핵을 언급하면서 본격화된 탄핵은, 같은 해 3월 5일 대통령이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비리 등에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하지 않을 경우, 새천년민주당은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겠다고 한 것.

대통령이 사과를 거부하자, 3월 9일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공동으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탄핵저지를 위한 국회 본회의장 농성에 들어갔다. 3월 11일 오후 탄핵소추안이 처음으로 국회에 상정됐으나, 열린우리당의 물리적 저지로 무산됐다.

우여곡적 끝에 탄핵안은 가결됐고 대한 국민적인 분노는 4월 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총선거에까지 이어져 열린우리당이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하고, 제1당이던 한나라당은 121석밖에 얻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제2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은 9석, 자유민주연합은 4석을 얻었다.

탄핵의결서가 헌법재판소에 접수된 뒤, 평균 주 2회씩 7번의 공개변론과 10회에 가까운 평의를 개최하는 등 집중적인 심리가 진행됐다. 대통령에 대한 증인신문은 기각됐고, 4월 30일 최후 변론이 종결된 뒤 헌법재판소는 2주일 동안의 집중 평의를 거쳐 결정문 작성에 들어갔다. 5월 14일 마침내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두 달 동안 계속된 대통령의 권한정지는 자동적으로 해소되고, 탄핵사태는 종결됐다.

탄핵이후 노 대통령의 행보가 수월해 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계속된 울퉁불퉁 행보를 겪게 된다.
보수적인 언론과의 적대관계, 코드인사, 4대 개혁안 실패에 따른 지지세력 이탈, 친북반미 정책에 따른 반발, 대북정책, 부동산값 폭등, 부적절한 발언 등으로 현재 10%도 못 미치는 지지율을 거듭하고 있다.

또한 여당과 정부와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정계개편 회오리에 휩싸인 것도 한몫하고 있다. 향후 1년이란 시간동안 노 대통령은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도, 국민의 신임을 사로잡기는 쉽지 많은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노 대통령은 사석에서 “(퇴임한 후) 국회의원 한번 출마해 볼까”라고 농반진반으로 말한 적은 있다고 한다. 정치권에서는 이 발언을 노 대통령이 퇴임한 후 정치를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특히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은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은퇴 문화에 대한 외국 사례를 모아보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고 소개한 뒤 “은퇴 문화를 새롭게 모색한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이 생각을 가다듬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며 “‘재임 기간의 경험을 어떻게 사회화할 것인가’라는 점에서 연구도 하고 저술 강연 활동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이 퇴임 후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 실장의 이날 발언에는 노 대통령이 퇴임한 후 다양한 정치 사회적 활동에 나설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 곳곳에 들어 있다. 이 실장은 “노 대통령은 올해 환갑을 맞았고, 이제 40, 50대 대통령도 나올 텐데 그런 대통령들이 퇴임한 후 사저에만 있을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는 “(퇴임한 대통령이) 정치 일선에 나서는 것은 맞지 않지만 정치 문화나 사회적 요구가 있는 부분에 대해선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민간인으로 돌아가도 정치할 터
그러나 일각에선 정치 영역의 최고 권력을 가졌던 노 대통령이 다시 정치에 뛰어들면 계속 과거의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즉, 현 국정 실패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는 만큼 최소한 다음 총선 때까지는 조용히 있어야 할 것이라고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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