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에 의한 실험적 대북정책의 위험성

홍성남 시인
홍성남 시인

사람의 마음은 흐르는 강물과 같다. 흐르면서 보이는 사물은 볼록렌즈와 오목렌즈 같은 두 마음에 비친다. 그 마음은 살아온 세월의 깊이와 갖는 시각에 따라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로서 교차하며 작용한다. 사람의 언행은 눈앞에 펼쳐진 사물이 어떤 렌즈로 보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볼록렌즈는 가운데가 두껍고 가장자리는 얇다. 물체와 가까이 있을 때는 크고 바르게 보이며 멀리 있을 때는 작고 거꾸로 보인다. 반면 오목렌즈는 가운데가 얇고 가장자리는 두껍다. 물체와 가까이 있을 때는 작고 바르게 보이며, 멀리 있을 때는 더 작고 바르게 보인다. 렌즈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모양에 따라서 빛이 굴절하는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볼록렌즈의 작용이 강하다. 내 안의 것은 작고 밖의 것은 크게 본다. 일상에서 상가 밖 거리에 펼쳐진 상품들이 그 현상의 하나다. 판매 할 물건을 거리에 내 놓는 것과 그렇지 않는 차이는 주인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볼록렌즈의 시각을 가진 주인은 가게 안의 물건을 하나라도 더 밖으로 내 놓으려고 애쓴다. 반면 그렇지 않는 주인은 오목렌즈의 눈길로서 손님을 가게 안으로 끌어당긴다.

이런 일상의 렌즈에 최근 한 줄기 빛이 투영 되었다. 평창동계올림픽이다. 볼록렌즈로 보였다. 안보불안과 경제침제의 상황에서 사는 게 답답함이 많던 국민들에게 평창동계올림픽은 환희와 기쁨에 앞서 걱정과 불안으로 깊이 들어왔다. 경제회복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는 묽어지고 있다. 우려되었던 북한과의 안보문제가 그 중심을 차지해 버렸다. 북한의 현송월이 다녀간 뒤 저러면 안 된다는 우려는 남한 선수의 마식령경기장 연습 경기를 보면서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며 국가의 정체성과 존재성을 걱정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 걱정은 오목렌즈에 의해 보이면서 분출 되었다. 삶이 편해 안보의 가치가 묽어져 있을 때는 작게 보이던 것이 위협의 체감도가 높아지면서 크게 보였다.

그 동안 물체와 가까이 있을 때 작고 바르게 보일 뿐만 아니라 멀리 있을 때 더 작고 바르게 보이는 오목렌즈는 작용하지 않았다. 한 쪽 눈을 가린 국민들은 사건의 진실을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로 보려하지 않지 않았다. 언론도 볼록렌즈에 의해 키워진 안보불감증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국민들은 오목렌즈의 시각을 가진 주인의 의해 쇼윈도우밖에 진열 된 상품들처럼 통일문제에서 들떠있다. 북한의 전단(삐라)이 서울시 곳곳에 흩날리고 인공기가 펄럭여도 그저 그런갑다한다. 평창동계올림픽을 오목렌즈로 보는 사람들은 인공기 태운 사람들을 실정법으로 수사하겠다고 한다. 그 동안 사회 곳곳에서 영역을 넓혀 온 친북성향의 행동들이 거침없이 분출되고 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재개는 북한의 현 경제구조에 따른 대북정책의 재조정 관점에서 모색 되어야 한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재개는 북한의 현 경제구조에 따른 대북정책의 재조정 관점에서 모색 되어야 한다.

'이게 국가냐하던 세력이 정권을 담당하면서 나타난 일이다. 이는 볼록렌즈만의 시각이 보여준 결과이다. 이제는 오목렌즈의 시각이 필요하다. ‘이게 국민이냐국가 질서와 안정을 생각할 때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국가의 국민으로서 통일과 선진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자유시장주의의 법질서 준수와 절제의 미학이 필요하다. 국가운영은 감성에 의한 실험의 대상이 아니다. 청와대 주인이 바뀌는 차원이 아니다. 한번 잘못 되면 국가가 없어지는 결과가 초래된다.

남북한 문제를 푸는 시각의 교정이 필요하다. 북한을 경제적 지원으로 그들의 병진노선을 수정시킬 수 있다는 볼록렌즈의 시각을 깨야 한다. 20여년 동안 고난의 행군으로 지속 되어 온 북한의 경제구조는 UN의 경제제제가 북한 경제를 완전히 봉쇄할 수 없다. UN의 경제제제는 중국과 북한의 특수한 경제관계가 달라지지 않는 한 미봉책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해결책은 아니다.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예상 되는 개성공단 가동과 금강산 관광 등 경제협력의 재개는 얻는 것 보다 잃는 게 많다.

지구상에 대한민국과 조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라는 국가만이 존재한다면 문제를 푸는 방식이 현재와 같은 방식이 용인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4대 강국의 호전적 퍼즐게임의 대상이 되어 있다. 더구나 70년 동안 적화통일을 국시로 내건 북한을 상대로 하는 분단국가이기 때문에 또 다른 형태의 실험적 대북정책은 현명한 방법이 될 수 없다.

통계학인 관상에 이런 말이 있다. “부모로부터 골격과 기질을 잘 받아 훌륭하게 태어났을지라도 국가의 변란과 천재지변 앞에는 물거품이다.” 국가안보가 불안하면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고 선진화와 통일을 과제로 남겨 둔 상태의 대한민국에는 이제 오목렌즈의 시각으로 북한을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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