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 중 아카데미 상 수상자만 3명, 후보자까지 포함하면 6명. 세계 영화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코폴라m`

영화에 관심있는 이들치고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대부> 3부작과 <지옥의 묵시록> 등으로 잘 알려진 '세기의 거장'이자, '사운트 앤 사운드'지가 10년마다 발표하는 '영화 역사상 최고의 감독 10인' 중에도 선정되었을 정도로 전설적인 존재가 되어 있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그리고 괴짜 배우에서 수퍼스타로 거듭난 니콜라스 케이지나 <록키>에서 '에이드리언' 역으로 인기를 모은 탈리아 샤이어,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에서 당당 주연을 맡은 제이슨 슈왈츠먼, <대부 2>의 주제음악으로 아카데미 작곡상을 수상한 영화음악가 카마인 코폴라, <버진 수어사이드>에 이은 두 번째 작품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각종 영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소피아 코폴라...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바로 이 모두가 한 가족, '코폴라' 가문의 일원이라는 점이다. 한 집안에 이토록 많은 영화계 인사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언뜻 믿기지 않는 일일텐데, 물론 볼드윈 가문이나 배리모어 가문, 아퀘트 가문, 휴스턴 가문처럼 가족들 대다수가 영화계에 뛰어든 예가 없지는 않아도, 코폴라 가문처럼 영화계 '명장'들이 모조리 몰려있는 가문은 전무후무하다고 볼 수 있다. 이번에는 이들, 세계 영화계의 로열 패밀리로 불리우는 '코폴라 가문'을 철저히 분석하고, '재능'이 대물림된 가장 성공적인 사례를 짚어 보기로 하겠다 세계 영화계의 대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포르노영화 감독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링컨이 통나무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만큼이나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치 그 '변혁의 시점'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는데, 로져 코먼 밑에서 <디멘샤 13>(1963)으로 장편영화 데뷔한 이래 세편의 '실패한 메이져영화'를 연속으로 발표해 코폴라의 커리어는 '바닥'으로 치달았었다. 바로 이때 등장한 영화가 '세기의 걸작'의 남게 된 <대부>(1972)였다. <대부>는 사실 그닥 '기대하지 않았던' 영화였다. 그러나 공개 즉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켜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을 비롯, 당시까지 존재했던 모든 흥행기록을 갈아치웠고, 이후의 코폴라 커리어는 전설에 가깝다. 2년 뒤 발표한 '소품' <컨버세이션>(1974)은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과 함께 '미국영화의 최대 전성기였던 1970년대'의 주옥같은 클래식 중 한편으로 남게 되었고, 같은 해 발표된 <대부 2>는 1편을 뛰어넘는 희대의 걸작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오랜 기간의 산고 끝에 발표된 <지옥의 묵시록>(1979)으로 코폴라는 다시 한번 깐느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며 '1970년대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코폴라의 이후 커리어는 하향곡선을 그렸다. <원 프롬 더 하트>(1981), <아웃사이더>(1983), <커튼 클럽>(1984)의 대대적인 실패로 인해 그는 어울리지도 않는 코미디물 <페기 수 결혼하다>(1986)를 연출하게 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는데, 1990년, 그를 '역사'에 남게 한 <대부>의 제 3편을 연출하여 리바운드를 노렸지만, 지난 두 편에 비해 형편없는 졸작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꾸준히 헐리우드에서 활약하며 <드라큘라>(1992), <잭>(1996), <레인메이커>(1997) 등의 수작을 만들어냈고, 비록 예전만큼의 '전설적인 걸작'을 만들어내진 못하더라도 꾸준히 수준급 이상의 작품들을 내놓아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아들의 덕을 본 영화음악가? 카마인 코폴라 결국 '코폴라'라는 성 자체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가문처럼 알려졌기에 그의 아버지인 카마인 코폴라는 '아들 덕에 이름을 알린' 케이스로서 종종 오해되고 있지만, 프란시스가 '뜨기' 전부터도 카마인 코폴라는 나름의 영역을 확보한 아티스트였다. 작곡가로, 지휘자로, 편곡가로, 그리고 플롯주자로서 맹활약한 바 있는 카마인 코폴라는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라디오 시티 뮤직 홀'에서 처음으로 고용한 플롯주자였을 뿐 아니라, 1936년부터 1941년까지는 '디트로이트 심포니'에서, 1942년부터 1948년까지는 'NBC 토스카니니 오케스트라'에서, 그리고 1948년부터 1956년까지는 '라디오 시티 뮤직 홀'의 스탭 팬곡가로 활약했으며, 1948년부터 1955년까지 '브룩클린 아카데미 오브 뮤직'의 오페라 지휘자로 활약한 바 있는 화려한 경력의 음악가였다. 또한 브로드웨이 무대극 "Once Upon a Mattress"의 음악 감독으로도 활동하여 그 입지를 명백히 굳히기도 했는데, 이런 다재다능하며 놀라운 경력의 음악가일지라도 결국 '영화'가 지닌 인기도에 힘입어 <대부>의 작곡가로서만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안타깝기도 하다. 카마인 코폴라의 영화음악 커리어는 완전히 프란시스의 경력과 일치하고 있는데, 1961년작 으로부터 <레인 피플>(1969), <대부>(1972), <대부 2>(1974), <지옥의 묵시록>(1979), <아웃사이더>(1983), <가든 오브 스톤>(1987) 등, 프란시스가 직접 감독한 영화들 뿐 아니라 그가 제작만 맡은 <블랙 스탤리온>(1979), <나폴레옹>의 리마스터링(1991)에 이르기까지, 아들의 영화에 흐르는 음악의 대부분을 그가 맡았다 볼 수 있으며, <대부 2>의 스코어로 아카데미 작곡상의 영예를 안았다. 아카데미 2회 노미네이트의 성격배우, 탈리아 샤이어 성이 달라 쉽게 코폴라 가문과 연결시키지는 못하지만, 사실 탈리아 샤이어는 카마인 코폴라의 딸이자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여동생이다. 조금 밉상의 얼굴에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는 그녀가 여배우의 길로 들어선 것은 그대로 프란시스의 영향이라 볼 수 밖에 없는데, 처음에는 프란시스와 함께 B급 영화계의 대부 로져 코먼 밑에서 단역 배우로 일하다 오빠의 출세작 <대부>(1972)에서 알 파치노의 여동생인 코니 역을 맡아 오빠와 함께 떠버린 케이스가 되었다. 이어 <대부 2>(1974)에서도 같은 역을 맡아 전편에 비해 비중면에서나 연기력면에서 훨씬 향상된 모습을 보여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되는 쾌거를 거뒀으며, 2년 뒤에 '별 기대없이 출연한' <록키>(1976)를 통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는 물론, '세기의 연인'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 <록키>는 실베스터 스탤론의 출세작이기도 한데, 이로써 탈리아 샤이어는 5년 동안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3편에 출연한 배우가 되었으며, 인지도 또한 급격히 높아져 <록키 III>(1982)에 이르러서는 출연료 100만 달러를 받아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독특한 외모와 고정된 연기패턴 탓인지 이후 그녀의 커리어는 하향길에 접어들었으며, 최근에는 다시 로져 코먼에게로 돌아와 비디오용 B급 영화에만 '우정출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코폴라'의 이름없이 성공한 케이스, 니콜라스 케이지 니콜라스 케이즈이 본명은 니콜라스 코폴라이다. '코폴라' 가문이라는 후광을 업고 배우 커리어를 시작하기 싫어 자신이 직접 붙인 예명인데, 실제로 프란시프 포드 코폴라의 세 작품 <럼블 피쉬>(1983), <커튼 클럽>(1984), <페기 수 결혼하다>(1986) 등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그를 결정적으로 띄운 영화는 다른 감독의 작품들이었다. <레이싱 위드 더 문>(1984), <버디>(1984) 등의 영화를 통해 차분히 커리어를 쌓아가던 니콜라스 케이지는, 1987년 코엔 형제의 <아리조나 유괴사건>(1987)과 노먼 쥬이슨 감독의 걸작 코미디 <문스트럭>(1987)을 통해 확실한 '스타'로 등극, 이후 '괴짜 배우'라는 소리를 들을 법한 마이너한 아트 필름들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쌓아갔는데, 대표작으로는 <뱀파이어 키스>(1989), 데이비드 린치의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광란의 사랑>(1990), 존 달의 <레드 락 웨스트>(1993)를 들 수 있다. 이렇듯 독특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그의 커리어는 마찬가지로 작가주의 인디영화인 마이크 피기스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를 통해 급반전했는데, 이 영화를 통해 니콜라스 케이지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뒀고, 이어지는 그의 '상업 액션영화'들인 <더 록>(1996), <콘 에어>(1997), <페이스 오프>(1997)가 연속 1억 달러 이상의 흥행을 기록하면서 이른바 '차세대 액션 스타'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현재 그의 '흥행스타'로서의 인기도는 약간 주춤한 감이 있으나, 대신 연기력 면에서는 꾸준한 상승세를 이루어 2002년작 <어댑테이션>을 통해 다시 한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명성을 이은 딸, 소피아 코폴라 소피아 코폴라는 프란시스가 가장 아끼는 자식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도 그럴것이, 마틴 스콜세지, 우디 앨런과 함께 프란시스가 옴니버스식으로 연출한 <뉴욕 스토리>(1989)에서 자신의 에피소드 각본을 아직 열여덟이던 소피아에게 맡긴 것은 물론, 이어 다음 해에는 자신의 커리어를 건 야심작 <대부 3>에 알 파치노의 딸 메리 역으로 '연기 경험도 전혀 없는' 그녀를 캐스팅한 것이다. 이런 탓에 그녀는 지난 수년간 '최악의 여배우' 리스트에서 빠지질 않는 수모를 겪었는데,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악명'을 그녀는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로 확실히 되갚아 오히려 효도를 했다. 그녀의 장편영화 데뷔작인 <버진 수어사이드>(1999)는 데뷔작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와 깊이를 지닌 작품으로서 비평가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그녀의 위치를 '최악의 여배우'에서 '가장 유망한 신예감독'으로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는데, 이어진 그녀의 4년만의 감독작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는 미 영화계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을 만한 걸작으로 등장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수많은 영화제로부터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본상을 수상해내는 쾌거를 거두었고, 다가올 2004 아카데미 상 시상식에서도 각본상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올라, 그의 아버지로 하여금 자랑스러운 멘트를 수많은 미디어에 남기게 하였다. 그 밖의 '마이너 코폴라'들 이 밖에 코폴라 가문에서 영화계에 뛰어든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이들을 꼽자면, 먼저 탈리아 샤이어의 아들이자 웨스 앤더슨 감독의 걸작 코미디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1998)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제이슨 슈왈츠먼과 소피아 코폴라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프란시스의 아들이자 소피아의 오빠인 (2001)의 감독 로만 코폴라, 그리고 니콜라스 케이지의 형이자 프란시스가 한 때 몸 담았던 B급 영화계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 <뱀파이어의 미망인>(1989)의 크리스토퍼 코폴라, 그리고 주로 코폴라 가문이 일원이 감독 또는 제작한 영화에서 조역급 배우로서 활약하고 있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남동생 마크 코폴라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영화계 영향력은, 적어도 현재 '진행중에 있는' 제이슨 슈왈츠먼과 로먼 코폴라를 제외하곤 상당히 제한적이라 볼 수 밖에 없는데, 집안 내력이 부여한 압력을 견뎌내면서 나름의 예술적 방향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이들이기도 하다. 결혼으로 맺어진 '엠파이어' 비록 코폴라 가문의 '피'가 흐르지는 않지만, '결혼'을 통해 코폴라가의 일원이 된 이들 중에서도 영화계 '수퍼스타'급이 많다. 먼저, 니콜라스 케이지와의 결혼을 통해 '코폴라'가와 '아퀘트'가의 연합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패트리샤 아퀘트가 있다. 비록 이혼으로 인해 코폴라가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경우가 되어버렸지만, 이후 니콜라스 케이지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의 결혼과 곧바로 따라온 이혼 등으로, '코폴라'가를 거쳐간 가문을 확장시켜 놓았다. 또한, 소피아 코폴라도 <존 말코비치 되기>(1999), <어댑테이션>(2002) 등으로 '21세기 영화의 새로운 기수'로 떠오른 스파이크 존즈와 결혼하여 '코폴라'가문의 영향력을 한층 올려놓았는데, 이들 역시 최근 관계가 삐그덕거린다는 소문이 돌아, 역시 하나의 정착된 '영화계 명가'를 확립시킬 수 있는 것은 같은 피가 흐르는 친족들 뿐이라는 점이 입증되었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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