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업계는 지난해 9월 복수폴사인제(이하 복수폴제)가 실시된 이후 내부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복수폴제를 둘러싸고 정유사와 주유소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면서 그동안 쌓였던 해묵은 감정이 분출되기 시작한 것. 특히, 복수폴제를 시행하려는 자영주유소와 이를 저지하려는 정유사 사이의 갈등은 법정으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최근 (사)주유소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복수폴제를 시행하고 있는 주유소는 20여 개 안팎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어 주도권은 이미 정유사 쪽에 넘어가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좌초된 복수폴사인제 복수폴제란 그동안 주유소에서 한 가지 브랜드밖에는 판매할 수 없었던 형태를 벗어나 한 주유소에서도 두 가지 이상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SK(주)의 폴을 달고 있는 주유소라고 하더라도 '소비자가 쉽게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적정한 표시'만 해놓으면, LG나 현대 혹은 에쓰오일 등 타사의 석유제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산업자원부는 소비자의 제품선택권 확대 등을 이유로 들어 지난해 9월부터 '복수폴제'를 실시한 바 있다. 주유소협회는 복수폴제의 의미에 대해 단순히 소비자의 제품 선택권을 확보한다는 차원을 넘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제품의 유통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지난해 있었던 공청회에서 주유소협회의 이주홍 부회장이 기존의 '단수폴제'가 "사업자의 영업권과 소비자의 알권리를 제한한 부당한 제도"라며 "석유유통시장을 정유사별로 분할, 고착시켜 신규참여자의 시장 진입을 제한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유소협회가 이처럼 복수폴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했던 것은 국내 석유시장의 불합리한 유통구조를 타파해 업계의 경영악화를 벗어나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 동안 주유소업계는 거리제한이 풀리면서 무분별하게 증가한 주유소수 때문에 심각한 경영악화에 시달려왔었다. 그러나 단순히 수치상의 증가만으로 경영이 악화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의 논리가 정유업계만큼 불합리하게 작용하는 곳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92년 거리제한철폐 이후 주유소의 급격한 증가와 더불어 시장에 신규 참여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가격의 결정구조는 시장의 논리와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공급자가 많으면 제품의 가격은 내려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국내의 정유업계는 석유수입사와 전자상거래업체 등 공급자는 늘어나는 반면, 기존의 규제로 인해 자유로운 시장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즉, 한 정유사의 폴만 달 수 있도록 한 기존의 단수폴제의 제약으로 인해 공급자는 증가하는데도 싼 가격에 물건을 들여올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합리한 유통체계를 타파하고 주유소업계의 불황을 극복하고자 도입했던 것이 바로 복수폴제라고 할 수 있다. 유통구조 혁신 '물 건너가나' 석유업계의 유통구조가 불합리하다는 것은 그만큼 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하다는 것과 더불어 시장 자체가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수십 년간 국내 정유사들은 국가기간산업이라는 특성상 국가로부터 온실 속 화초처럼 보호·육성되어 왔다. 지난 '90년대 중반 이후 불어닥친 세계화 추세 속에서도 정유업계만은 국가로부터 지속적인 지원과 혜택을 받아왔다. 유통시장의 대부분이 IMF를 전후해 개방되었지만 여전히 해외의 메이저 정유사들은 국내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산업자원부가 주위의 여러 가지 우려 속에서도 지난 '97년 정유업계의 개방을 전격 단행한 것은 어찌 보면 고육지책이었다. 국내 정유업계의 유통구조는 그만큼 불합리하고 낙후되어 있어 체질의 변화가 매우 절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해외 메이저 정유사가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면 국내 정유사들 역시 경쟁력 제고를 위해 유통구조를 혁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물론 현재까지 국내에 진출한 해외 메이저 회사는 한 곳도 없는 실정이다. 한편, 산업자원부와 주유소업계가 제도를 바꿔가면서까지 경영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데에는 덤핑유로 인한 시장의 혼란도 큰 몫을 차지했다. 주유소 업계는 최근 몇 년 동안 '덤핑유'의 유통 때문에 심한 몸살을 앓아 왔다. 덤핑유란 정규 시장에 유통되지 못한 무자료 거래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의 사용이 대다수 주유소로 일반화되면서 정부에서도 수수방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산자부는 복수폴제를 실시하면서 이러한 덤핑유의 음성적인 거래를 양지로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았지만, 제도가 사실상 좌초되면서 이 또한 '물 건너' 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주유소들이 현행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왜 그 동안 덤핑유를 사용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유사로부터 직접 들여오는 석유제품보다 드럼당 많게는 2만원 이상 싼 가격에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유소 운영자들은 자신들을 탓하기 전에 덤핑유를 시중에 흘리는 정유사가 우선적인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한 주유소 소장은 이에 대해 "정유사가 남아도는 제품을 시중에 싼값에 풀면 현금 유동성이 큰 주유소를 중심으로 이를 매입해 주위의 주유소들보다 싸게 팔 수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덤핑유를 사용할 수 있는 주유소는 그나마 정유사와의 채권관계가 없는 곳이어야 가능하다"며 "이를 사용하지도 못하고 정유사가 주는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채권 주유소는 사실상 경쟁력 악화로 문닫는 곳이 많다"고 밝혔다. 즉, 정유사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에게 채권이 있는 주유소에게는 정가를 받으면서 물건을 팔고, 채권이 없는 주유소나 타사의 폴을 달고 있는 주유소에게는 할인가에 판매를 했다는 것이다. 조사기관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나타나긴 하지만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덤핑유는 총 유통량의 약 30%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덤핑유 시장 30% 장악 주유소들이 정유사측에 채무를 지니고 있는 이유를 살펴보면, 주유소간 거리제한이 완전 철폐되면서 늘어난 주유소수와 관련이 있다. 즉, 거리제한이 없어지면서 정유사들간에 폴사인 경쟁이 시작된 게 직접적인 원인이다. 단수폴사인제 상황에서는 폴사인의 점유율이 곧 시장점유율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정유사들은 앞다투어 폴사인 확보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당시 정유사의 권유로 주유소를 운영하게 되었다는 한 업자는 "주유소만 지으면 떼돈을 벌 듯이 온갖 감언이설로 땅주인들을 설득했지만, 오히려 늘어난 주유소 때문에 흑자를 내는 곳은 많지 않다"고 밝혔다. 특히, 차량의 통행이 많은 곳에는 십여 개씩 주유소가 즐비해 오히려 늘어만 가는 채무 때문에 땅까지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처럼 '92년 당시 늘어난 주유소는 필연적으로 업계의 경영악화를 부채질했고, 게다가 넘쳐나는 덤핑유로 석유유통시장은 그야말로 혼탁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유사와 주유소간 갈등의 골이 깊게 패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고, 정유사의 폴을 떼고 자체폴을 제작해 운영하는 '무폴'도 이 때 등장했다. 무폴로 주유소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운영자들조차 생소했다고 한다. 전주의 한 무폴주유소 사장은 "내 스스로 무폴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지만 정유사들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일념으로 과감히 전환했다"고 설명했다. 대신 여러 정유사들로부터 보다 싼값에 제품을 받아올 수 있어서 오히려 영업마진은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고 한다. 정유사와 채권 주유소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형성되면서 각 지역별로 주유소협회를 중심으로 채권상환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정유사에 상환해야하는 이자의 비율이 은행이자보다 높아지자 은행에서 융자를 내서라도 채무를 갚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다. 소규모의 조합들은 서로의 단결된 힘을 통해 '채권상환'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부분 정유사의 폴을 떼 무폴로 전환하거나 폴을 달고 있더라도 기름은 여기 저기서 자유롭게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무폴이 급속도로 증가하자 덤핑유가 '현물'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다소 양성화되기 시작했다. 석유전자상거래업체의 등장은 이러한 무폴의 증가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자석유거래소(www.Oilpex.com)와 넷오일(www.net-oil.net), 오일체인(www.oilchain.com) 등은 대표적인 업체들이다. 채권상환만이 살길인가 전자상거래업체와 석유수입사의 등장은 무폴주유소의 급격한 성장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이를 통해, 현물의 유통량이 막대하게 늘어났고 일부 석유수입사는 자체 직영주유소를 운영하면서 국내 석유업계는 정유사와 수입사, 전자상거래업체의 공급자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공급자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정유사에 채권을 상환하지 못한 주유소들은 하나둘씩 경쟁력 악화에 시달리다 패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정유사의 발목 잡힌 이들 주유소들은 딤핑유나 현물을 받지 못해 가격 경쟁력에서 크게 뒤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복수폴제의 시행으로 주유소의 제품 사입가와 소비자 판매가가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선발 정유사의 '복수폴 불가' 방침으로 시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현재 복수폴로 운영되고 있는 주유소의 대부분은 특정 정유사와 무상표제품(현물)의 조합을 이루고 있을 뿐, 정유사와 정유사의 조합은 꿈도 꾸지 못한다고 말한다. 한 석유수입사 관계자는 이러한 복수폴제에 대해 "제도만 바뀌었을 뿐 기존과 비교해 변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단정지었다. 어차피 정유사로부터 자유로운 주유소는 정유사든 수입사든 현물을 마음대로 받을 수 있고, 채권이 있는 주유소는 망하거나 정유사의 손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는 또 "복수폴제의 시행 취지에 비추어볼 때 현재와 같은 기형적인 형태의 복수폴은 결국 한시적일 수밖에 없고 앞으로 이들(복수폴) 주유소는 무폴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실제로 복수폴로 운영하다가 무폴로 전환한 주유소의 수 역시 상당히 많다고 한다. 에쓰오일을 제외한 SK나 LG의 경우에는 내부적으로 '복수폴 불가' 의지를 강력하게 내비치고 있다. 지난해 복수폴제가 시행되면서 발생한 역곡주유소와 형제주유소 사건은 이들 정유사의 복수폴 불가 방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 두 주유소는 정유사에 채권이 없는 상태에서 그 동안 '명목상 폴'만 유지한 채 현물을 통해 운영하던 곳이었다. 대부분의 주유소들이 이런 식으로 운영을 해왔으므로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막상 복수폴로 운영하려고 하자 정유사에서는 막무가내로 자사의 폴을 떼어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정유사측의 주장은 "그 동안 자신들과의 거래가 거의 없었으므로 더 이상 계약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형제주유소의 사장은 이 같은 정유사의 주장을 일축했다. 몇 년 전부터 폴을 떼어가라고 해도 '제발 폴만 유지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 와서 복수폴을 하겠다니까 계약 위반 운운하는 것은 아전인수격이라고 성토했다. 현재 형제주유소는 무폴로 운영중이다. 역곡주유소 역시 형제주유소와 비슷하긴 하지만 상황은 훨씬 좋지 않다. 역곡주유소는 인근에서 상당히 오래된 주유소로 단골고객이 많은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라인에 같은 정유사 폴을 단 주유소가 새로 생기면서 경영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뻔히 결과를 알면서도 정유사가 이를 용인한 것에 대해 역곡주유소는 매우 불쾌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경영악화를 막으려고 복수폴을 시도하자 정유사는 자사 직원들을 동원해 강제로 폴을 철거하려고 했다고 한다. 현재 정유사측은 소비자들의 여론을 의식해 대외적으로는 복수폴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정유사 "복수폴 절대 안돼" 복수폴제의 실시가 가시화되기 시작한 지난해 초부터 정유사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정유사에 채권이 있는 주유소들 중 경영이 어려운 주유소를 인수해 '직영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평균 20% 안팎이었던 정유사 직영주유소의 숫자는 30%대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정유사들이 복수폴 불가를 천명하면서 자사의 폴을 떼어낸 것도 상당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가 정유사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풀이된다. 정유사가 직영주유소를 운영하는 것은 자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이용해 차별화된 서비스와 제품의 질로 고정 소비자를 유치하겠다는 것이다. 취지야 나무랄 데 없는 것이지만 문제는 그 '직영화 과정'에 있다. 주유소 운영자들은 애초에 주유소를 하도록 바람을 넣었던 정유사가 이제는 채권을 갚지 못한다는 이유로 주유소를 빼앗듯이 인수하는 것에 대해 '말도 안 된다'는 입장이다. 광주의 한 주유소 소장은 처음에는 자신의 땅에서 운영하던 입장에서 현재는 '고용된' 입장으로 바뀌었다며, 정유사의 말만 믿고 시작한 게 죄라고 후회했다. 그는 정유사의 행태에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한 채권 주유소 운영자 역시 이에 대해 "주유소 거리제한 철폐 이후 주유소를 새로 지은 곳은 거의 대부분이 채권 주유소"라며 "주유소만 지으면 큰돈을 벌 것처럼 떠들어대던 정유사가 이제는 채권을 담보로 주유소의 수익성 악화에 일조 하더니, 이제는 아예 주유소까지 내놓으라고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영악화로 인해 주유소를 처분하고 싶어도 인수할 사람이 없는 것에 비해서는 그나마 낫다는 주장도 있다. 주유소를 처분하고 그 땅에 다른 건물을 지으려면 환경부담금 등 최소한 5천만원 이상 들어가는데 이것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유사에 채권은 그대로 있는 상황에서 주유소마저 처분이 안 된다면 그야말로 낭패라는 입장이다. 현재 인터넷 사이트 등을 통해 주유소의 매매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주유소가 밀집된 곳 등은 헐값에도 사려들지 않는다고 한다. 산업자원부 석유산업과의 한 관계자는 "현재의 석유유통구조로는 정유사의 과점체제를 벗어나기 힘들며, 시장의 신규참여자에게 매우 불리한 조건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특히, 국가기간산업인 석유산업에서 정유사들의 입김 역시 무시할 수 없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정유사들이 변하기를 원해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질 것이 없으므로, 시장참여자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높여 가는 게 중요하다"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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