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영화계의 흐름을 좌우하는 깐느영화제, 2004년 경쟁부문 주역들의 면모를 살펴본다

베니스, 베를린과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깐느의 위력은 다른 두 영화제와 차원을 달리 한다. 베니스나 베를린이 결국 '올해의 아트필름 쇼케이스'에 불과하다면, 깐느는 그야말로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한 데 아울러 '세계영화계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영화 트렌드의 진원지이기 때문. 특히나 올해의 깐느 경쟁부문 라인업에는 사상 최초로 한국영화가 2편 -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 - 올라있어 한국 영화팬들의 각별한 관심을 사고 있는데, 이번에는 '올해의 트렌드'를 만들어나갈 깐느 영화제 경쟁부문 라인업에 대해 철저히 살펴보고, 과연 올해는 어떤 영화가 깐느의 영예를 얻어갈 수 있을지, 그리고 올해의 전반적인 영화계 흐름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 나갈 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 2046 (d. 왕가위) 영화 관계자들로부터 '2046년에나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했던 왕가위의 8번째 장편 "2046"이 드디어 완성되어 깐느에 입성하게 되었다. 특히 이번 깐느영화제 심사위원장인 쿠엔틴 타란티노가 왕가위를 서구세계에 소개한 장본인임을 생각해볼 때, 이번의 황금종려상 최유력 후보로 "2046"을 꼽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 '2046'호라는 호텔방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러 남녀의 군상이라는 것 외에 특별히 스토리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으며, 장첸, 장만옥, 금성무, 양조위, 왕비, 장지이 등 톱스타들이 이 길고 지리한 촬영기간을 함께 했다. ■ 클린 (d. 올리비에 아사이야) 장만옥의 전남편이자 고집스런 외곩수 아티스트 올리비에 아사이아의 '깐느 공략전'은 실로 눈물겹다. 2년에 한 편씩 - 2000년의 "감상적인 운명", 2002년의 "데몬러버" - 깐느 경쟁부문을 노크하고 있는 그는, 그러나 특유의 평면적인 난해성과 시각적 아이디어의 부재, 좁다란 세계관을 직격적으로 퍼붓는 단순함 탓에 일반관객들에게 큰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한 것이 사실. 어찌됐건 '개최국 파워'에 힘입어 꾸준히 깐느를 통해 이름을 알리고 있는 케이스이다. ■ 이미지처럼 (d. 아녜스 자우이) 지난 2000년 "타인의 취향"을 통해 국내팬들에게도 친숙한 아녜스 자우이를 처음으로 깐느에 입성시킨 작품. 역시 자우이 특유의 세련되고 감성적이면서 유머러스한 터치가 기대되는 작품이며, 만약 깐느가 자국영화를 '밀어주기로' 작정했다면, 그 수혜자는 단연 자우이일 것이라는 예상이 압도적이다.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아시아에 걸쳐 확고한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감독이라는 점도 큰 플러스 요인이 된다. ■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d. 월터 살레스) 지난 1998년, "중앙역"의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브라질 출신의 감독 월터 살레스가 희대의 혁명영웅 '체 게바라'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다. 이 영화는 1950년대 초반에 체 게바라가 그의 동료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모터사이클로 남미를 여행하면서 겪었던 일을 다루고 있으며, 그닥 정치적 소재를 즐기지 않는 깐느이지만, '다문화적 사고'의 강요에 의해 살레스가 선택될 가능성도 있다. ■ 교육자들 (d. 한스 바인가르트너) 한스 바인가르트너는, 그 이름을 알고 있다면 '엄청난 매니아'에 속할 정도로 지명도가 없는 인물. 그도 그럴 것이, "교육자들"은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에 불과하며, 그의 데뷔작 "하얀 소리"(2001)도 본국인 독일 내에서만 반향을 일으켰을 뿐, 정작 세계적인 무대에 나가본 일이 없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거의 '초짜'에 가까운 감독의 작품이더라도 이처럼 당당하게 경쟁부문에 진출하는 것을 보면, 깐느도 별 수 없이 유럽영화인들의 축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엑실 (d. 토니 가틀리프) 뮤지컬/코미디의 거장 토니 가틀리프의 신작도 드디어 깐느 경쟁부문에 올랐다. "스윙"(2002), "미친 이방인"(1997) 등에 반했던 팬들이라면 대단한 희소식일 듯. 가틀리프의 세계는 분명 현대인들의 복잡다단한 사고체계를 꿰뚫어 이를 희극적으로 재해석해낸다는 점에서 '현대 희극'의 대표주자로서 인식될 법한데, 이번 작품이 성공한다면 가틀리프는 전세계적으로 그 이름을 떨치게 될 - 사실 그의 커리어는 생각보다 길고, 세계적으로 알려져야 할 작품들도 다수 있다 - 가능성이 농후하다. ■ 화씨 9/11 (d. 마이클 무어) 전작 "볼링 포 콜럼바인"을 통해 전세계적인 극찬을 얻어낸 마이클 무어의 두 번째 '안티-아메리카' 토로 다큐멘터리. 무어의 인기도와 인지도 - 누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의 그를 잊을 수 있으랴! - 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해볼 때, 처음 맞이하는 '다큐멘터리 수퍼스타'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라도 '무언가를 줘서 돌려보내지 않을까'하는 예상 또한 나오고 있다. 무어 특유의 저돌적이고 신랄한 스타일이 사뭇 기대되는 작품이다. ■ 이노센스 (d. 오시이 마모루) 드디어 저패니메이션이 깐느 입성에 성공했다! 그 첫 번째 타자는 지난 1995년 "공각기동대"를 통해 구미와 유럽의 젊은이들을 열광케했던 오시이 마모루. 그리고 작품은 다름 아닌 "공각기동대"의 속편 "이노센스"이다. "이노센스"의 경쟁부문 진출은 여러 저패니메이션 거장들의 깐느 진출에 대한 신호탄으로도 여겨지며, 드디어 젊은이들의 '컬트 아이템'에서 세계비평계의 중심으로 떠오른 저패니메이션의 위력을 만천하에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타란티노의 저패니메이션에 대한 애착으로 미루어보아 수상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d. 홍상수) 홍상수의 깐느 진출은 다분히 '고무적'인 것이었다. 벌써 두 번을 비경쟁 부문에서 머물렀었고, 구미에서의 인지도도 높아지고 있어 사실 '더 먼저' 예우를 해줬어야 하는 케이스. 이번의 경쟁 부문 진출은 그의 지난 작품들이 차례로 프랑스에서 소개되어 전격적으로 벌어진 일인데, 과연 지극히 유럽적 취향의 홍상수 영화가 영화 악동 타란티노에게 어떤 식으로 먹혀 들어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 니나 산타 (d. 루크레시아 마르텔) 아르헨티나 출신의 루크레시아 마르텔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감독이다. 지난 2001년의 "스왐프"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긴 했지만, 그래도 전세계적으로 인지도를 지니고 있는 감독은 아니며, "니나 산타" 역시 새롭게 일고 있는 '남미 영화 열풍'에 휩쓸린 운 좋은 케이스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수상 가능성은 다소 희박하며, 지나치게 '남미 영화 스타일' - 저돌적인 유머와 섹스담론, 정치적 풍자 등 - 이라 조금 식상하다는 의견도 있다. ■ 사랑의 결과 (d. 빠올로 소렌티노) 난니 모레티의 뒤를 잇는 이태리의 새로운 블랙 코미디 작가 빠올로 소렌티노의 두 번째 작품이다. 전작 "한 남자가 일어서다"(2001)가 이태리 내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 깐느에 진출하게 된 케이스로, 앞서 언급한 한스 바인가르트너처럼 왠지 '유럽에서 태어났기에' 이득을 보고 있는 케이스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역시 수상 가능성은 희박하며,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 정도로 만족해야 할 듯 싶다. ■ 아무도 모른다 (d. 히로카주 코레에다) 지난 1998년, "원더풀 라이프"로 일약 전세계적 스타덤에 오른 이후, 2001년 "디스턴스"로 첫 깐느 입성에 성공한 히로카주 코레에다의 신작. 아직 작품에 대해선 많이 알려진 바가 없지만, 현재 일본 영화계에서 가장 선전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해볼 때, 그리고 비교적 널리 작품들이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의 수상 가능성은 높다고 볼 수 있다. ■ 올드 보이 (d. 박찬욱) 우리의 예상과 달리, 깐느에서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보다는 "올드 보이"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듯하다. 비경쟁부문에서 경쟁부문으로 급선회시킨 장본인이 바로 타란티노 본인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으며, '아시안 느와르'를 누구보다 즐기는 이가 타란티노이기에 실제로 수상가능성이 "여자는..."에 비해 훨씬 높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박찬욱은 구미에서의 팬층이 두텁기에, 이번 영화제의 다크호스로 활약할 듯 싶다. ■ 슈렉 2 (d. 앤드류 아담슨, 켈리 애스버리, 콘래드 버논) 분명히 말해 지난 2001년 "슈렉"의 깐느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은 대단한 이변이었다. 신 테크놀로지 개발에 대한 공로와 헐리우드 공식에 대한 풍자를 가미한 탓에 까다로운 유럽 비평가들로부터 어느 정도 호응을 얻어낸 케이스에 속하긴 해도, 그 속편까지 경쟁부문에 진출했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어찌됐건 "슈렉 2"는 '1억 달러 이상의 제작비가 투여된 블록버스터 속편'이 깐느에 입성할 수도 있다는 기묘한 사례를 남기게 되었고, 수상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보아도 좋을 듯 싶다. ■ 레이디킬러 (d. 조엘 코엔, 에단 코엔) 코엔 형제는 깐느의 수혜를 지나치게 많이 입은 감독들이다. 그들은 벌써 감독상을 세 번, 황금종려상을 한번 거머쥐었고, 발표하는 작품마다 깐느에서 대환영하며 받아준다. "레이디킬러"처럼 미국 내에서 쏟아지는 혹평을 받으며 흥행에 대실패한 영화마저도 말이다. 수상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그저 코엔 형제에 대한 깐느의 '의리'를 보여주는 케이스라고만 여겨도 좋을 듯 싶다. ■ 피터 셀러스의 삶과 죽음 (d. 스티븐 홉킨스) 잠시 스티븐 홉킨스라는 감독의 커리어를 살펴보자. "나이트메어 5", "프레데터 2", "블로운 어웨이", "고스트 앤 다크니스", "로스트 인 스페이스"...어쩌다 이런 감독이 깐느 경쟁부문에 입성했단 말인가? 이유는 단 하나,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피터 셀러스'라는 배우 본인에 대한 유럽인들의 애정 때문일 것이다. 피터 셀러스 역은 제프리 러쉬가 맡았고, TV용으로 제작된 영화가 경쟁부문에 입성했다는 드문 사례까지 보여주었지만, 수상가능성에 대해선 확실히 미지수이다. ■ 트로피컬 말라디 (d. 아피챠트퐁 위라세타쿨) 타이의 난장판 코미디 감독 위라세타쿨의 신작도 깐느에 입성했다. 복장도착증 비밀요원이 시골로 잠입한다는 이야기를 다룬 "아이언 푸시의 전설"(2003)로 전세계인들의 배꼽을 뺀 지 겨우 1년 만에 얻어낸 쾌거이다. 타이 영화가 깐느에 진출한 것은 최초의 일이어서 본국에서도 열렬한 환호를 받고 있다고. 이런 '지역적 희귀성' 탓에 수상 가능성도 약간 점쳐지고 있다. ■ 삶은 기적이다 (d. 에밀 쿠스트리차) 에밀 쿠스트리차 역시 깐느의 은혜를 많이 입은 감독. "짚시의 시간"(1989) 이후 별다른 미학적 변화나 발전이 없어 영화팬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진 감독이기도 한데, 잔혹한 유머와 가슴 따뜻한 페이소스, 노골적인 정치성과 휴머니즘 예찬을 한데 아우르는 쿠스트리차의 스타일은 여전히 나이 든 비평가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저 '고정 멤버' 이상의 역할을 할 가능성도 있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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