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여권 대선예비후보들 집중분석 2: 넘버 투 접고 대권 도전 나서···

김근태 빼놓고 80년대 학생운동·재야운동 논할 수 없어
고문지옥 견뎌낸 초월적 인물···살아서 전설이 된 사람
전문가그룹 대선주자 선호도 1위···대중적 이미지는 약점

▲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만년 2인자로 살아온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1인자의 위치에 오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는 사람이 있다. 바로 ‘고문지옥 견뎌낸 살아서 전설이 된 사람’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다.


김 의장을 빼놓고선 1980년대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을 말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젊은 활약상은 투사 이미지였다. 그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가 ‘큰 꿈’을 꾸고 있다. 바로 대권이란 이름 앞에 1인자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시절, 어머니의 힘으로

1947년생인 김근태 의장은 소사(지금의 부천)에서 태어났다. 어릴적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평택의 청북과 진위 초등학교, 양평의 원덕을 거쳐 양수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명문중학교였던 경복중학교 진학에 실패한 후, 광신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 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어린시절은 평범해 보였다. 당시 최고 명문인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아버지는 교장선생님이라 생활고에 시달리지도 안했을 법하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 시절 뜻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졌다.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강제로 교직을 그만두시게 된 아버지가 그 충격으로 심장판막증에 걸려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생활은 궁핍해졌고 어머니는 아픈 몸을 이끌고 동대문시장에서 여자 스타킹과 양말을 받아다 이 학교, 저 학교를 다니면서 팔기 시작했다. 김 의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의 어머님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초월적 인간이 된 사연

1965년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한 김 의장의 ‘투사이미지’ 전력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1967년 대통령 부정선거 규탄시위로 경찰서에 끌려가 무지막지한 매를 맞고 제적을 당하고 군대에 강제로 징집된다. 1970년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 복학했지만 3선 개헌, 교련 데모, 대통령 선거 파동에 깊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한 정신과 전문의는 김 의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문 지옥 견뎌낸 ‘초월적 인물’, ‘살아서 전설이 된 사람’이라고 말이다. 김 의장을 빼놓고는 1970~1980년대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을 말할 수 없으며, 그의 고난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한국 사회에서 자행된 야만적인 고문을 말할 수 없다. 김 의장은 그 시절을 회고하며 “유신과 군사독재가 없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좀더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미래를 계획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을 통한 장기집권 음모와 유신독재를 통한 영구집권 음모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1971년 그는 7년여의 끝이 보이지 않는 피신생활을 해야 했다. 유신독재에 저항한 서울대생들의 시위, 이른바 서울대생 국가내란 음모사건과 학생 시위 배후 조종이라는 혐의로 말이다.

그는 1980년 광주항쟁 이후 분노와 공포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1983년 9월, 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두려움을 무릅쓰고 민청련을 결성해 민주화 운동에 나선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남영도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고문을 당했다. 그는 1987년 6월 항쟁을 감옥에서 맞이했고 그 후 만1년 만에 겨우 석방됐다. 1988년 후반, 당시까지의 모든 민주세력이 총결집한 민주운동 조직인 전민련을 결성해 집행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990년 또다시 투옥됐고 1992년 8월까지 2년 3개월의 수형생활을 겪었다.



미국서 더 알아주는 ‘김근태’

1985년 미주 한국일보 기자였던 심기섭 한국냉장사장은 한국의 인권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인재근 여사(김근태의 처)에게서 당시 김근태 민청련 의장에 대한 남영동 고문사실을 전해 듣고 가수 이미자 노래 테이프 중간에 이 사실을 녹음, 미국언론과 인권단체들에 폭로했다.


뉴욕타임즈는 크게 기사화했고 세계의 인권단체들은 강력한 항의를 한국 정부에 전했다. 이후 김근태 지도위원과 인재근 여사는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공동 수상했고, 독일의 함부르크 재단은 김근태 지도위원을 세계의 양삼수로 선정했다.


또 다른 일화가 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한 김근태 지도위원 부부는 케네디가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지도위원은 15대 총선 직전까지 복권되질 않았다. 공안기관과 정보기관은 새정치국민회의에 참가한 김 지도위원에게 복권을 해줘선 안 된다는 견해였기 때문이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도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복원은 우연한 기회에 이뤄졌다. 미국을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이 에드워드 케네디를 만나게 됐는데, 이때 그가 김근태 지도위원의 복권을 강령하게 요청한 것이다. 결국 김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고 김 지도위원은 1대 총선에 출마, 당선한 것이다.



대선자금 양심고백
고백. 고백은 하기 힘들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사랑고백’도 그리 힘든데 말이다. 그중에서 가장 힘든 것은 아마도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아픔이 있는 ‘양심 고백’이 가장 아프지 않을까 싶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있었던 김근태 의장의 대선자금 양심 고백은 그를 ‘우스꽝스런 바보’로 만들었다.


2002년 3월, 그는 2000년 8월의 민주당최고의원 경선비용을 공개하고 불법정치자금의 관행을 바로 잡고자 했다. 그러나 오히려 역풍을 맞아 민주당 대통령 경선후보를 사퇴했고 검찰의 기소를 받게 됐다. 많은 이들이 김 장관을 변호했고 정치자금법의 비현실성에 대해 비판하고 재판정에서 그를 응원했지만 아무도 그의 뒤를 이어 정치자금에 대해 양심고백을 하지 않았다.


구습과 관행에 젖은 현실정치는 그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김 의장은 “내가 정치자금 문제를 처음 고백할 때만 해도 김근태는 끝났다, 왜 도움을 준 사람을 파느냐고들 했다”며 “권노갑 고문을 팔려고 했던 게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이럴 바엔 정권 교체를 왜 했느냐는 의문이 나오기 시작한 때여서 우선 정치 자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나 자신부터 고백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물론 재판도 받고 역풍이 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정치 발전의 계기를 제공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물론 그가 불법 정치 자금을 받은 것은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의 정치판 바꾸기에 대한 열정은 쉽사리 공개할 수 없었던 다른 정치인들과는 차별화 된다. 먼 훗날, 그의 ‘바보 같았지만 용감했던 결정’은 재평가 돼야 할 것이다.



‘김근태와 이근안’의 인연

고문 기술자로 악명 높던 이근안 씨가 지난 7일 경기도 여주교도소에서 7년 형기를 마치고 만기 출소했다. 그는 “그 동안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송구하다”며 “배후세력도 없고 앞으로 신앙생활에만 매진하겠다”고 했다.


이 씨는 경기도경 대공분실장으로 있으면서 납북 어부 김성학 씨를 감금하고 고문한 혐의로 지난 1999년 11월 구속 기소됐으며 이듬해 9월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이 확정됐다. 그러나 그의 유명세(?)는 김근태 의장과의 오래전 인연 때문이었다.


김 의장은 과거를 이렇게 회상한다.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모욕적인 상황이어서 기억하고 싶지않다”고 말이다. 그동안 김 의장은 고문의 기억 때문에 상당한 고통을 겪어왔다. 김 장관은 고문 후유증으로 심한 비염을 앓아오다 2001년 수술까지 받았으나, 완치가 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김 의장은 여주교도소를 찾았다. 수감 중인 이 전 경감을 면회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지난 1985년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 전 경감이 김 의장을 전기고문하고 물고문한 이후 20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날 김 의장은 이 전 경감에게 “과거 갈등이 깊은 시절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났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서 과거의 원망이나 미움, 원한은 잊었다. 용서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의장의 한 측근은 “김 의장이 고통스러운 과거를 완전히 정리하고 싶었을 것”이라며 “과거의 상처로 갈등이 깊은 우리 사회가 용서와 화해를 통해 새 출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 측근은 “이 전 경감도 종교에 귀의한 뒤 종교인을 통해 김 전 장관에게 참회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김 의장은 출소한 이 전 경감에 대해 “여생 건강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중적 이미지 확보로 승부수

그의 약점은 젊은 층에 어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중정치인으로서 치명적 약점이 아닐 수 없다. 김 장관은 과거 정치부 기자 200여명이 선정하는 ‘올해의 백봉신사상’을 세 차례 받았다. 정직성과 언행일치에서 최고점을 받았으며 교양, 지성, 품성, 합리적 처신, 모범적 의정 활동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또한 알게 모르게 한국여성유권자연맹에서 주는 2000년 남녀평등 정치인상 등을 수상했고,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가 국회의원, 정치학자, 정치부 기자 등 정치전문가 집단 150여명을 대상으로 한 차기 대선 주자 선호도 조사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이는 그가 숨겨진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만약 그가 대중적 인기도만 확보가 된다면 대권을 움켜질 만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젊은 층에 어필하기 위한 행보를 많이 보이고 있다.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개설하고 홈페이지를 통해 네티즌들과의 소통에 적극 다가서고 있다.


김 의장은 자신의 낮은 대중적 이미지에 대해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잘 접근하기 위해 서비스와 포장을 잘해야 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며 “하지만 너무 쇼로 치우치게 되면 정치 내용이 없어지고 쇼비즈니스가 돼 버린다”고 말했다.


준비돼 있는 정치인, 이제 그가 대중적 이미지를 등에 업고 만년 2인자에서 1인자로 도약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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