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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의 후궁이 된 헌목황후 조절
홍성남 칼럼니스트  |  hong15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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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14  08:04:15
   
 
헌재의 후궁이 된 헌목황후 조절

헌목황후獻穆皇后 조절曹節(186년-260년)은 조조曹操의 딸로 헌제獻帝에게 시집을 가서 후궁이 되었다. 후한의 마지막 황후이며 청하공주의 자매이다.

213년 건안 18년 7월 조조는 자신의 세 딸인 조헌曹憲, 조절曹節, 조화曹華를 헌제에게 시집 보냈다. 이들은 모두 귀인貴人이 되었다. 조절은 214년 11월 복황후와 그녀의 아버지 복완伏完이 조조를 제거하려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후 215년 1월에 귀인 첩지를 받은 지 2년만에 황후로 책봉 되었다.

조조는 딸 셋을 헌제에게 시집보내 황제의 장인으로서 권력을 굳혀 갔다. 하지만 황후가 된 조절은 친정아버지 조조의 편에만 설 수 없었다.

조헌과 조절이 헌제의 귀비로 시집을 가게 되었을 때 변씨가 두 딸을 걱정하는 것을 보고 조식은 동생들을 위해 글을 지었다.
 
서수부 敘愁賦
時家二女弟, 故漢皇帝聘以為貴人. 家母見二弟愁思, 故令予作賦. 曰:
嗟妾身之微薄, 信未達乎義方. 遭母氏之聖善, 奉恩化之彌長.
迄盛年而始立, 修女職於衣裳. 承師保之明訓, 誦六列之篇章.
觀圖像之遺形, 竊庶幾乎英皇. 委微軀於帝室, 充末列於椒房.
荷印紱之令服, 非陋才之所望. 對牀帳而太息, 慕二親以增傷.
揚羅袖而掩涕, 起出戶而彷徨. 顧堂宇之舊處, 悲一別之異鄉.
 
영황英皇 이라는 표현은 영황은 요임금의 딸로 순임금의 두 부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말한다. 열녀의 대명사 이다. 영황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동생들에게 아버지의 지위를 믿고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되며, 헌제를 성심성의껏 모셔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당부하고 있다.

조조가 두 딸을 헌제에게 보낸 목적 자체가 정치적인 의도가 강했던 만큼 출가를 앞둔 조헌과 조절의 정신적 부담감이 상당했는데 그런 동생들에게 아황과 여영이라는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하며 격려하는 조식의 모습은 조조나 조비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 이었다.

헌목황후는 헌제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다. 장남 남양왕南陽王 유빙劉馮은 요절하고 3남 산양왕山陽王 유의劉懿는 헌제의 산양공의 직위를 이어 받았다. 이후 유의의 아들 유강劉康이 산양공山陽公으로 51년 재위하다 285년 태강太康(서진西晉 무제武帝) 6년에 사망 했다.

220년 조비曹丕가 선양을 받아 후한이 망하고 위나라가 세워졌다. 헌목황후는 헌제의 편에서 선양을 반대 했다. 후한서 헌목황후전獻穆皇后傳에서 “위魏가 황제의 자리를 선양 받고자 사자를 보내어 옥새를 가져오라고 하였지만 화가 난 황후가 주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찾아오자 황후는 사자를 불러들이더니 꾸짖으며 건네주는데 옥새를 난간 아래로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흐느껴 울며 이르기를 ‘하늘이 너희들을 도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측근들은 아무도 쳐다볼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황후에 오른 지 일곱 해 만이었다.

옥새를 가져간 조비는 헌제를 산양공山陽公으로 조절을 산양공 부인으로 책봉하였다. 그로부터 마흔한 해가 지난 후 260년 6월 세상을 떠났다. 당시 황제였던 조환曹奐은 한나라의 예법에 따라 조절을 장사지내고 헌목황후獻穆皇后라 했다. 그녀는 죽은 뒤 산양공山陽公으로 강등된 헌제와 합장되었는데 수레와 예복, 의식 등을 모두 한나라의 제도에 따랐다. 헌제의 무덤인 선릉禪陵에 합장된 조황후는 헌제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나관중은 삼국지연의의 ‘헌제를 폐하고 한나라를 찬탈한 조비’라는 구절에서 조황후를 다르게 묘사했다. 역사적 사실과 큰 차이가 난다. 여러 관리들이 헌제를 핍박하며 황제의 자리를 양보하라고 하니 놀란 헌제는 내실에서 감히 바깥출입도 하지 못한 채 숨어 지낸다. 그것을 이상히 여긴 조황후가 그 이유를 묻자, 헌제는 흐느껴 울면서 모든 사실을 황후에게 말한다.

그러자 조황후가 대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내 오라비가 나라를 찬탈하는 도적이 되었다고 하는데, 너희 고조高祖는 거저 술만 마셔대던 패현沛縣의 필부에다 근본도 없는 건달로서 진왕조秦王朝를 겁탈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내 아버님은 천하를 깨끗이 소탕하고 나의 오라버니는 수많은 공을 쌓아왔는데, 어째서 황제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네가 황제 자리에 있었던 30여 년 동안 만약 나의 아비와 오라비가 없었더라면 너는 가루가 되고 말았을 것이야.”라고 한다.

조황후는 황실을 핍박하는 편에 서서 조비의 한실 찬탈을 돕는 가담자로 묘사되었다.
반면 청나라의 모종강이 쓴 본의 삼국지연의는 이 단락을 다음과 같이 고쳤다. ‘조 황후가 이르기를 “백관들이 폐하를 청해서 조회를 열려고 하는데, 폐하께서는 무슨 이유로 물리치십니까.” 헌제는 울면서 대답하기를 “황후의 오라비가 황위를 빼앗고자 하여 백관들로 하여금 핍박하게 하니, 짐이 그 때문에 나가지 않는 것이오.”

조 황후가 대노하며 말하기를 “나의 오라비가 무엇 때문에 이런 반역을 저지른단 말입니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홍과 조휴가 칼을 들고 들이닥치더니 황제를 대전으로 나오라고 한다. 조 황후가 크게 나무란다. “너희 난적의 무리들이 부귀영화를 도모하여 함께 역모를 꾀했구나. 지금 내 오라비가 위왕의 자리를 물려받은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처지에 함부로 황위까지 찬탈하려는 욕심을 부린다면 하늘은 반드시 너희에게 벌을 내릴 것이다” 말을 마치고는 통곡하며 궁으로 들어가 버린다. 좌우에서 모시던 시자待者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흐느낀다.’

모종강의 묘사는 조황후의 태도가 사서에 기재된 내용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또한 조비가 한을 찬탈한 일이 민심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여동생조차도 극구 반대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조조를 폄하하려는 삼국지연의의 주제에 부응하는 묘사이다.

정사 삼국지의 내용은 위에서 보듯이 나관중과 모종강의 묘사에서도 큰 차이가 난다. 이후 여러 삼국지 책에서도 각기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 작가의 관점과 문장력에 따라 다르게 묘사 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의 부합성이다. 따라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볼 때도 정사에 얼마만큼 충실했느냐가 중요하다.

후한의 마지막 비운의 황제 헌제는 헌목황후獻穆皇后 조절曹節과 헌효황후獻孝皇后 조헌曹憲) 그리고 복황후伏皇后 등 3명의 황후와 후궁 귀인貴人 조씨曹氏와 후궁 귀인貴人 동씨董氏, 후궁 귀인貴人 송씨宋氏 등을 두었다. 후궁 귀인 조화曹華는 헌목황후 조절과 헌효황후 조헌의 여동생이다.
후궁 귀인 동씨는 동승의 딸로 조조를 암살하려 한 동승의 음모가 발칵 되어 동승과 함께 조조에 의해 살해 되었다.

복황후는 195년 5월 20일 헌제가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겨오기 직전이던 시절에 황후가 되었다. 그 당시 헌제의 나이는 어린 14살 이었다. 그후 20년이 지난 214년에 조조를 암살하려 한 것이 들통 나 조조에게 살해되었다. 복황후의 두 아들은 조조에게 독살 되었다.

헌제의 차남 제음왕濟陰王 유희劉熙와 4남 제북왕濟北王 유막劉邈 5남 동해왕東海王 유돈劉敦과 위나라 문제 조비의 귀인이 된 장녀와 차녀 그리고 3녀 장락공주長樂公主 유만劉曼은 생모가 누구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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