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링 세계챔피언 김일 선수, 지병으로 별세

▲ 故김일 선수의 영정
박치기 하나로 시대를 풍미했던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가 지난 10월 26일 낮 12시 17분 서울 하계동 을지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7세. 김일은 평소 당뇨합병증, 고혈압, 심부전 등의 지병을 앓아왔다. 주치의가 소식을 전하자, 을지병원에 있던 딸 애자(61), 순희(59) 씨 아들 수안(56) 씨를 비롯해, 김일의 제자인 이왕표 한국프로레슬링연맹 회장 등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고 일부는 울음을 터뜨렸다. 스타의 입원을 미리 알고 있었던 다른 병실의 환자들도 그 분위기에 동참했다. 이들뿐 아니다. 어린 시절의 꿈과 희망이었던 별이 진 것에 많은 이들이 명복을 빌었다. 10월 28일 오후 경기도 벽제에서 화장한 뒤, 유골은 고향 전남에 안치된다. 많은 이들이 김일에게 프로레슬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서 레슬링을 배우고,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의 꽃을 피운 그의 연대기는 열정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역도산 기사 보고 일본 밀항 김일은 192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180센티미터의 건장한 체격과 괴력을 갖고 있던 김일의 운명은 어느날 우연히 일본 잡지에 실린 역도산의 기사를 보고 바뀐다. 씨름에서는 천하장사였던 김일은 프로레슬링으로 이름을 떨치겠다고 결심했다. 부모도 16살 때 결혼한 아내도 모르게 일본행 배를 탔다. 복대에는 씨름판에서 모은 자금을 지니고. 그러나 김일의 일본행은 순탄치 않았다. 불법체류자로 체포돼 1년형을 살았던 것. 그 1년간 역도산에게 편지를 보냈고, 역도산은 얼굴도 모르는 김일의 신원을 보증하고 그를 감옥에서 구해냈다. 이어 1957년 김일은 역도산체육관에 1기로 입문하면서 프로레슬링을 시작했다. ‘오오키 긴타로’라는 일본명은 프로레슬러로서의 그의 이름이었다. 김일은 가난하던 1960년대 서민들의 위안이자 청소년들의 영웅이었다. 온갖 반칙에 코너에 몰리다가 위기의 극단에서 박치기 일격으로 상대선수를 제압하는 모습, 무엇보다도 일본인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대결에서 선보인 박치기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다. 호랑이 모습의 삿갓과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 일본 프로레슬러들을 상대로 싸우는 장면은 TV앞의 시청자들을 열광시켰다.
▲ 챔피언 벨트를 차는 전성기의 김일 선수
김일이 세계 챔피언에 오른 해는 1963년이었다. 선천적으로 단단한 이마를 앞세워 미국 로스앤젤리스에서 세계프로레슬링협회(WWA) 대회에서 세계태그챔피언에 등극했다. 그러나 같은 해 스승 역도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고국으로 돌아와 대한프로레슬링협회를 설립했다. 1964년 북아메리카 태그챔피언, 1965년 극동 헤비급 챔피언, 1966년 올아시아 챔피언, 1967년 세계헤비급 챔피언 등 무수한 챔피언 벨트를 손에 넣으며 승승장구했다. 1972년 도쿄 대회에서 마지막으로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며 1970년 중반까지 세계 프로레슬링을 휘어잡은 김일은 프로레슬링 인기가 몰락하면서 은퇴했다. 故장영철, 천규덕 등 한국프로레슬러 1세대가 김일과 함께 프로레슬링의 인기를 주도하던 선수들이었다. 이중 ‘백드롭의 명수’ 장영철은 지난 8월 유명을 달리했다. 프로레슬링의 몰락은 그의 ‘쇼’ 발언이 원인이기도 해, 41년간 김일과 장영철은 원수처럼 지내오다가 지난 2월 극적으로 화해했다. 천규덕은 이제 배우 천호진의 아버지로 더 익숙할 정도다. 은퇴 이후 김일에 대한 소식은 이런저런 투병 소식이 대부분이었다. 사업가로 변신은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선수생활에서 얻은 후유증이 김일을 괴롭혔다. 1994년에 국민훈장 석류장, 2000년에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기도 했다. 은퇴한 것은 1970년대였지만, 은퇴식은 그때 한 번이 아니었다. 일본 신문기자단은 1995년 도쿄돔에서 김일의 은퇴식을 다시 마련해주었고, 한국에서도 대한체육회가 2000년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거행했다. 최근 건강이 호전돼 후진을 양성하겠다는 의욕을 보였지만, 작년 결장 제거수술 이후 운신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후진 양성의 대업은 제자 이왕표와 역발산이 이을 것으로 보인다. 이왕표는 한국프로레슬링연맹 회장으로 김일과 함께 프로레슬링의 부활을 도모해왔고, 역발산도 링을 떠나 헬스클럽을 운영하다가 지난 2004년 신한국프로레슬링협회에 동참했다. ◆이왕표·역발산, 프로레슬링 이을 듯 13년 동안 치료를 받아왔던 을지병원에서도 김일은 영웅이었다. 김중봉 을지병원 원무부장은 “다른 환자나 문병객들이 그분을 보려고 병실을 방문해 사인을 받아갔다”고 말했다. 김일은 1994년부터 4층에 병실을 무료로 제공받고 치료를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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