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와의 사이에서 3남

▲ 홍성남 칼럼리스트
모반으로 죽은 조표의 어머니 첩 손희                                      
 
손희孫姬(?~?)는 조조와의 사이에서 3남을 두었다. 일찍 죽은 1남 임읍상공자臨邑殤公子 조상曹上홍성난(?~?)과 2남 초왕楚王 조표曹彪(195-251년) 그리고 장남과 같이 일찍 죽은 3남 강상공자剛殤公子 조근曹勤(?~?) 이다.

1남 임읍상공자 조상은 요절했다. 231년 태화 5년에 봉국과 시호를 추증했지만 후사가 없었다.
2남 초왕 조표(195~251년)의 자는 주호朱虎이다. 216년 건안 21년 수춘후壽春侯에 봉해졌다. 이어 221년 황초 2년에는 작위가 올라 여양공汝陽公으로 옮겼고 이듬해 익양왕弋陽王에 봉해졌다. 이해 오왕吳王으로 옮겼다.

231년 태화 5년 겨울에는 낙양에 입조했다. 이듬해 초왕楚王에 봉해졌다. 당초 입조했을 때 금령을 어겼다. 그로 인해 233년 청룡 원년 담당 관리가 상주하여 3개현 모두 1500호를 깎였다.
그러나 이듬해 대사면 때 회복되었다. 두부인의 아들 조곤도 금령을 어긴 것으로 인해 조표와 같은 해에 삭봉을 당했고 또 같은 해에 회복 되었다. 239년 경초 3년에 5백호가 늘어 3천호가 되었다.

249년 가평(3대 조방) 원년에 태위 왕릉과 연주자사 영호우가 동군 지방에 돌고 있던 요사스런 말과 조표의 자인 주호를 연관시켜 조표를 황제로 맞아들이고, 수도를 허창으로 옮기려는 모의를 했다. 영호우는 휘하 장군 장식張式을 파견하여 조표와 왕래했다.

그런데 사전에 모의가 발각되었다. 사마의는 왕릉을 토벌하러 수춘으로 향했다. 왕릉은 사마의에 의해 연행되어 가던 도중 항 땅에서 약을 먹고 자결했다. 그의 시체는 이미 죽은 영호우와 함께 전시되었다.

사마의는 수춘으로 들어온 후 일을 철저하게 규명하여 조표에게 죽음을 내렸다. 조표는 자결로서 생을 마감했다. 조표의 비와 아들들은 서인으로 면직되어 평원으로 유배되었다. 조표의 관속 이하 감국알자(조정에서 파견한 감시자)는 조표의 모반 의사를 알고서도 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주살되었다. 봉국을 몰수하여 회남군으로 했다.

조표의 수명에 얽힌 일화가 있었다. 주건평朱建平(진晉나라 상술가相術家)은 문제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되었을 때 초청을 받아 여러 사람의 수명을 예언 했다. 조표에 대해서는 “번국에 웅거하다 57세에 이르면 병란의 재앙을 당할 것이니 마땅히 이를 막아야 한다.”라고 예언했다. 조표가 왕릉의 일에 엮이어 죽음을 받았을 때의 나이는 57세였다.

조표의 후사는 폐황제 조모가 254년 정원 원년에 조서를 내려 조표의 세자 조가曹嘉를 상산진정왕常山眞定王에 봉해 잇도록 했다.
“고인이 된 초왕 조표는 국가를 배반하고 사악함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몸은 죽고 봉국은 몰수되었다. 비록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지만 불쌍하게 여기고 있다. 오점을 포용하고 결점을 가리는 것은 친족에게 친하는 방법이다. 조표의 세자 조가를 상산진정왕으로 봉하거라.”

260년 경원(5대 조환) 원년 식읍이 증가되어 이전 것과 합쳐 모두 2500호가 되었다.
3남 강상공자 조근은 231년 태화(2대 조비) 5년에 요절했다. 봉국과 시호를 추증했는데 후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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