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불류외인肥水不流外人

▲ 홍성남 칼럼리스트
친조카딸을 며느리 삼은 윤부인
 
윤부인은 진의록의 처 이었다가 조조에게 시집을 간 두부인의 입장과 심정을 잘 이해 할 수 있는 첩 이었다. 당초 그녀는 대장군 하진何進의 아들 하함何咸의 부인 이었다. 하함과의 사이에 아들 하안何晏(?~249년)도 두었다. 남편이 죽은 후 아들 하안을 데리고 혼자 살았다. 조조가 사공으로 있을 때 윤부인의 미모에 빠져 하안과 함께 데려 왔다.

조조의 양자가 된 하안은 두부인과 조조 사이에서 낳은 딸 금향공주를 아내로 맞아 부마가 되었다. 조조는 ‘비수불류외인肥水不流外人 즉 기름 진 물은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지 않는다’ 하여 친딸인 금향공주를 양자인 하안에게 시집 보냈다. 두부인의 입장에서는 친조카딸을 친아들과 혼인시켜 며느리를 삼게 되었다.

비수불류외인은 남 좋은 꼴은 못 시킨다는 의미인데 조조의 생각에 매우 귀한 딸인 금향공주를 남의 집 며느리로 주기 아까우니 양자인 하안에게 시집 보내 영원히 함께 데리고 살겠다는 것이었다.
하안何晏(193년?-249년)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다. 자는 평숙平叔으로 후한後漢 말기의 외척으로 대장군까지 지낸 하진何進의 손자이다. 어머니가 조조와 결혼하면서 양자가 되었다.

조부 하진은 십상시의 난 때 죽음을 당했다. 종조부 하묘何苗도 조부의 암살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아 죽었다. 이후 정권을 잡은 동탁에 의해 고모할머니 하태후何太后와 그 아들 소제가 폐위당한 뒤 독살당 했다. 이어 종조부 하묘도 조부를 죽게 했다는 이유로 동탁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져 시체가 절단되어 길에 버려졌다.

증조할머니 무양군舞陽君을 비롯한 하씨 일족들이 동탁에 의해 몰살당했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 하암은 목숨을 보존 했다. 그렇지만 일찍 병사했다. 어머니 윤尹씨는 조조에게 재가하여 하안은 조조의 양자로 들어가 위나라 궁정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는 일찍이 노장老莊에 심취하였다. 이후 조조의 딸인 금향공주金鄕公主를 아내로 맞아 부마가 되었다.

그러나 하안의 거리낌 없는 기질과 시류를 좇아 권세에 기대는 추시부세적趨時附勢的 성정 때문에 문제文帝 조비와 명제明帝 조예는 그를 중용 하지 않았다. 조비는 하안이 조조의 양자라는 지위로 허세를 부리는 것이 못마땅해 관직에 임명하지도 않았다.

조예가 죽자 그의 양자인 조방曹芳이 8살의 나이로 제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황족인 조상曹爽이 권력을 잡았다. 하안은 발 빠르게 그의 수하로 들어가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임명되면서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입성했다.

하안은 조상을 필두로 하는 붕당을 조직하였다. 중요한 국사는 조상이 쥐고 모든 결재를 조상이 먼저 심사 하도록 하였다. 조상의 붕당에는 하안을 비롯하여 재주는 있지만 경박한 사람들인 경박재자輕薄才子들이 대부분 이었다.

하안은 자신들의 세력과 영합하는 자는 승진시키고, 거스르는 자는 파면시켰으며, 또한 당시 권력의 가도를 달리던 사마의司馬懿를 정계에서 물러나도록 만들었다. 조상의 권력을 더욱 확실히 다졌다. 태후의 궁도 자신들의 뜻대로 옮기고 조방이 명령한 일에는 사사건건 간섭하였다.

조상에 대한 관료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249년 조방과 조상 일파가 조예의 능인 고평릉高平陵에 제사를 드리러 간 사이 사마의가 군사를 일으켜 하안을 비롯한 조상의 일파를 죽이는 고평릉의 변을 일으켰다.

하안은 삶의 근본을 정치가 아닌 학문에 두었다. 현학과 유학, 도가 학문에 두루 깊은 연구를 했다. 당시의 지재이던 왕필王弼을 발탁하는가 하면 논어집해論語集解, 주역강소周易講疏, 도덕론道德論 등 여러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한편 하안은 자신의 외모를 많이 가꿔 이름을 날렸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 다니며 자신의 그림자가 으쓱대는 것을 즐겼다. 이런 것에 대해 당시 유명한 점술가 관로管輅는 “얼굴이 하얗고 걷는 것이 나무와 같은 하안은 귀鬼의 상으로 오래 장수할 상이 아니다”라고 평하였다. 그는 56세로 죽었는데 고평릉의 변을 통해 적중하였다.

하안은 조상 세력의 일원이 되어 권세를 떨치다가 고평릉의 변에서 사마의에 의하여 삼족이 멸했다. 그러나 금향공주는 살아 남았다. 윤부인은 조조와의 사이에서 일찍 죽은 아들 조구曹矩를 두었다. 범양민왕范陽閔王 조구曹矩(?~?)는 어려서 자식 없이 요절하여 봉호도 없었다. 217년 건안 22년 번안공樊安公 조균曹均의 아들 조민曹敏이 조구의 뒤를 이어 임진후臨晉侯에 봉해졌다. 222년 황초 3년에 다시 추증하여 범양민공范陽閔公에 봉해졌고, 2년 후 조구는 범양왕范陽王에 봉해졌다.

226년 조민은 황초 7년 봉지를 구양句陽으로 옮겼다. 230년 태화 4년 조구의 시호를 범양민왕范陽閔王이라 하였고, 조민을 다시 낭야왕琅邪王에 봉하였다.
경초, 정원, 경원, 연간에 봉지를 더하여 모두 3400호를 받았다. 조민이 죽은 뒤 시호를 원왕原王이라고 했고 아들 조혼曹焜이 왕위를 계승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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