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의 호남 껴안기 ‘업그레이드’

▲ 고 홍남순 변호사의 영결식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지난 15일 고 홍남순 변호사의 빈소를 찾았다. 홍 변호사는 박 전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통치시절, 반독재투쟁에 앞장섰던 인물. 박 전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연대나 한·민공조를 추진하면서 한나라당 서진정책의 주역을 자임해왔다. 박 전 대표에 내년 대선을 위해 동서화합에 이어 민주화세력과의 제휴에 나선 것 아니냐는 분석까지 있다. 물론 홍 변호사의 빈소를 찾은 것은 박 전 대표뿐이 아니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등 한나라당 3강과 고건 전 총리, 정동영 열린우리당 전 의장도 ‘광주의 어른’을 찾았다. 변별성이 있다면 박 전 대표가 대선주자들 중 첫 테이프를 끊었다는 것 정도. ◆아버지 정적의 빈소 찾아 홍 변호사는 대표적 인권변호사로 호남지역 민주화 운동의 큰 별로 일컬어진다. 1960, 70년대 박정희 치하에서 반독재 투쟁을 한 시국사범들의 무료 변론을 도맡았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는 내란수괴 혐의로 옥고까지 치렀다. 이제 홍 변호사의 상징성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민주화운동 동지라는 점으로 집약된다. 김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 때 홍 변호사의 둘째 아들 기훈을 전남 화순에 공천한 적도 있다. 13대에 이어 14대 총선에서도 당선한 홍기훈 전 의원이 15대 공천에서 탈락하면서 둘 사이는 냉각됐지만, 두 인물이 호남 민심의 향방을 가르는 상징적 인물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김 전 대통령과의 연대를 추진하고 있는 박 전 대표다. 박 전 대표는 지난 2004년 김 전 대통령을 만나 “아버지 시절의 피해와 고통에 대해 딸로서 대신 사과드린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 김 전 대통령과의 연대설이 돌았고 지난 1일에도 연대설에 대해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대표적인 보수논객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는 DJ-박근혜 연대설을 “아주 부자연스러운 제휴”라고 일축한다. “지난 두 체례의 ‘보수 분열-좌파 승리’를 목격”해온 김 전 대통령 또는 친노 세력이 “한나라당 경선에서 패배하는 세력”에 제휴의 손길을 내밀고 독자후보를 내도록 유도해 보수를 분열시키려는 의도라는 시각이다. 이를 위해 조 전 대표는 “김대중측이 박 전 대표를, 노무현계 좌파세력이 이 전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박근혜 연대’가 동서화합과 국민통합을 명분으로 결성된다면 그 역사적 의의와 파괴력은 상상 이상이라는 평가다. 역사적인 면을 살펴보면 동서분열을 초래한 장본인의 자녀와 피해당사자와의 화해다. 아니, 말로 화해는 진작 했으니 ‘협력’이라는 점이 갖는 의의는 크다. 여기에 두 세력의 협력이 가능해지려면 그만큼 한나라당의 정책이 김 전 대통령에 가까워질 것이므로 좌우 이념갈등도 어느 정도 누그러지는 효과를 유발할 수도 있다. 전남지역 재·보선 지원유세를 돌고 있는 박 전 대표는 지난 18일 “햇볕정책의 정신과 기조에 줄곧 찬성해왔다”고 밝혔다. 이는 김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참여정부의 포용정책을 분리 대응하는 한나라당의 당론과도 일치한다. 박 전 대표가 사실상 당권을 쥐고 있으니 당과 엇박자를 낼 리 없을 듯하다. 게다가 박 전 대표가 2002년 북한을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 적 있음을 떠올리면 ‘햇볕정책 지지’가 그리 빈 말만은 아닐 것 같다. 그렇다면 파괴력은? 1988년 민자당의 3당 통합, 1997년 대선 때의 DJP공조 이상이 될 수 있다. ‘박정희의 딸’, ‘선거불패’ 말고는 이렇다 할 정책적 성과가 없는 것이 약점으로 평가되는 박 전 대표로서는 영·호남 통합이라는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날선 무기를 갖는 셈이다. 비록 ‘정치 불개입’을 천명하긴 했지만 범여권 정계개편과 북한 핵실험을 둘러싸고 발언의 수위와 빈도를 높인 김 전 대통령의 영향력은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달리 건재함을 과시했다. 정계개편을 추진하는 정동영 열린우리당 전 의장과 김근태 의장도, 포용정책 수정 방침을 철회하는 노무현 대통령도, “햇볕이 핵무기를 키웠다”는 전여옥 한나라당 최고위원을 자제시키고 “포용정책이 햇볕정책을 망쳤다”고 발언한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도 모두 김 전 대통령의 눈치를 보고 있다. DJ-박근혜 연대설은 아직까지는 지나치게 정치 공학적이라는 비난을 듣는 수준이다. 그러나 박 전 대표와 한나라당의 서진정책은 갈수록 노골화되고,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의 숙원인 영·호남 화합을 위해 정치적 강수를 둘지도 모른다. ‘연대’의 현실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뜻이다. 이 시나리오에는 ‘한·민 공조’도 축의 하나로 작용한다. 여기서의 한나라당은 박근혜의 직계세력이고 민주당은 김 전 대통령의 유일하게 생존한 적자인 한화갑 민주당 대표 중심의 동교동계일 것이다. 특히 이 자리에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그분의 노력과 헌신으로 평가돼야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박 전 대표는 그동안 부친의 통치시절 때 민주화운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는 매우 인색했기 때문이다. 이번의 첫 번째 ‘립 서비스’는 아니다. 박 전 대표는 작년에도 “4·19정신도 5·18광주도 함께 안고 가야할 소중한 역사”라고도 했다. 한나라당 대표 재임 27개월 동안 호남을 방문한 것만 17차례이고, 지난 18일에는 호남을 찾아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은 우리나라 발전을 이끈 양대 기둥”이라며 구애를 계속했다. 때문에 단순히 김 전 대통령과의 연대, 호남과의 연대를 넘어 민주화세력에까지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벌써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동거’라는 그럴 듯한 카피까지 나왔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동거 박 전 대표는 최근 10%이상 뒤쳐져 있다. 당권을 쥐고 있어 당내 경선에 유리하다고 하지만, 안심할 때가 아니다. 반전을 위해 박 전 대표가 꺼낸 ‘DJ카드’가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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