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의록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 진랑秦朗

 
진의록의 부인에서 조조의 첩이 된 두부인
 
두부인杜夫人(?~?)은 조조의 첩 이었다. 두부인의 첫 남자는 조조가 아 니 었다. 조조의 첩이 되기 전 그는 여포呂布 휘하의 장수 진의록秦宜祿의 부인 이었다. 진의록과의 사이에서는 아들 진랑秦朗을 두었다.

진의록은 후한 말의 정치가로 병주幷州 운중군雲中郡 사람이다. 진의록은 여포의 사자로 원술袁術에게 외교관 자격으로 갔을 때 원술에게서 한漢왕실의 여자를 배필로 얻었다. 여포가 조조의 공세에 밀려 하비에서 농성 할 때 진의록의 전처 두씨杜氏는 하비에 남아 있었다.

이때 조조군의 진영에 있던 관우關羽는 두씨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 조조에게 청했다. 조조도 수락했다. 그러나 여포 토벌 후 두씨가 미인임을 알게 된 조조는 약속을 어겼다. 두씨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관우는 이를 불쾌하게 여겼고 두 사람의 사이는 두씨 문제로 서먹하게 되었다. 진의록은 항복하여 조조의 막료가 된다. 조조는 진의록을 패국 질현장에 임명하였다.

199년 건안 4년 유비가 소패小沛에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장비張飛는 진의록에게 “아내를 빼앗은 자를 섬기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니 나를 따라 오라.”고 말하며 유비를 섬기자고 말했다. 진의록은 “아내를 빼앗은 사람과는 함께 할 수 없다.”며 투항했다.

그러나 곧 후회하고 조조에게 귀순하려다 적발되어 장비에게 살해 되었다. 진의록의 아들 진랑秦朗은 어머니 두씨杜氏가 조조曹操의 측실이 되었기 때문에 조조가 길렀다.
진랑(199년 이전~?)은 위의 정치가로 자는 원명元明이며 병주幷州 신흥군新興郡 운중현雲中縣 사람이다. 아명은 아소阿蘇이다.

진랑은 성장하면서 제후들의 틈에서 놀았다. 그럼에도 조조와 조비 대에도 처벌받는 일은 없었다. 명제明帝가 즉위한 후 진랑은 표기장군驃騎將軍 겸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명제가 외출할 때마다 가까이서 수행하였다. 진랑은 명제가 남의 허물을 들춰 죄를 주는 것도 말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명제는 진랑을 신뢰하였다. 명제는 진랑을 위해 수도에 대저택을 지어주기까지 하였다. 진랑은 무능 했지만 황제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뇌물을 바치는 사람이 많아 재산은 공公과 후侯에 버금갈 정도로 늘었다.

명제 대에 진랑은 대장군인 연왕燕王 조우曹宇, 영군장군領軍將軍 하후헌夏侯獻, 무위장군武衛將軍 조상曹爽, 둔기교위屯騎校尉 조조曹肇와 함께 정치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237년 경초景初 2년 12월 중서감中書監 유방劉放과 중서령中書令 손자孫資가 진랑의 태도에 대해 명제에게 참언讒言 하였다. 그 결과 진랑은 조우 등과 함께 파면되었다.

두부인은 조조와의 사이에서 2남1녀를 낳았다. 1남 패왕沛王 조림 曹林(?~256년)과 2남 중산왕中山王 조곤曹袞(?~235년) 그리고 딸 금향공주金鄕公主이다. 금향공주는 하가下嫁 하안何晏에게 시집 보냈다.
패목왕沛穆王 조림曹林(?~?)은 조조와 두씨杜氏의 아들이다. 2남1녀 중 1남이다. 211년 건안 16년 효양후에 봉해졌고, 217년에는 봉국이 초로 옮겨졌다.
이복형 문제에게서 221년 황초 2년에 공으로, 이듬해에는 왕으로 승진을 받았다. 이후 견성과 패로로 봉읍이 옮겨져 패왕沛王이 되었다. 경초(2대 조예), 정원(4대 조모), 경원(5대 조환) 중에 계속 봉읍이 늘어나 4700호에 달했다.

죽은 후에는 아들 위緯가 뒤를 이었다. 다른 아들 찬贊은 일찍 죽은 아저씨 현玹의 뒤를 이었으나 아들 없이 요절하였다. 또 다른 아들로 찬의 아우 일壹이 현의 뒤를 이었다. 혜씨보에 따르면 혜강의 아내가 패목왕의 손녀라고 한다.

중산공왕中山恭王 조곤曹袞(??~235년)은 조조의 11남이며, 동복형제로는 형 조림曹林과 누이동생 금향공주金鄕公主가 있다.
그는 향후平鄕侯에 봉해졌고, 이후 동향후東鄕侯, 찬후贊侯 등에 봉해졌다. 이복형인 조비에 의하여 황초 2년 221년에 공으로 봉해졌으며, 이듬해 북해왕北海王에 봉해졌다. 그 후로도 찬왕贊王, 중산왕中山王 등 봉지를 전전하였다.

조곤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즐겼으며, 10대 때부터 뛰어난 문장력을 기술하였다. 일생 동안 2만여 개의 문장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조곤은 성품이 온화하고 소박하였으며, 자신의 처첩들에게도 베를 짜게 하는 등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카 명제 조예曹叡가 그를 흠모하였다. 한번은 입조하였을 때 금령을 범하여 233년 청룡靑龍 원년에 고소 되었다. 결과는 담당 관리가 완강하여 조곤의 식읍 두 현 및 750호를 깎였다. 그러나 조예는 조곤의 처벌을 원치 않았고 조곤 또한 근신하였으므로 이듬해에 복권시켰다.

235년 청룡 3년 가을에 병들자 태의의 진료를 받았다. 태비와 형 패왕 조림의 문병을 받았다. 그러나 병은 더욱 심해졌다. 속관들에게 명령을 내려 죽을 준비를 해 동당을 짓게 했다. 동당이 완성되자 수지지당遂志之堂이라 이름 짓고, 그곳으로 옮겨 세자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 그해에 죽어 요절했다. 시호로 공왕恭王이 내려졌다. 마지막 봉국이 중산이므로 중산공왕中山恭王이라 했고, 그의 뒤는 적자 조부曹孚가 이었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