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文과 무武라는 방법은 다르지만 훈공의 결과는 같아

▲ 홍성남 칼럼니스트
조조가 총애한 아들 조충을 낳은 환부인④

책봉하는 조서가 도착하기 전에 여흥은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겨울 10월 1일 조서를 내렸다.
“옛날 성덕이 있는 제왕은 혼란을 진압하여 세상을 구하고 천하를 보존시켜 공적을 이루었다. 비록 문文과 무武라는 방법은 다르지만 훈공의 결과는 같다.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간干과 척戚을 휘둘러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어떤 경우에는 군대를 이끌어 난폭하고 오만한 자를 위협했다.

백성을 사랑하고 국가를 보호하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품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먼저 문교文敎를 닦아 백성들에게 법칙을 말하고, 부득이한 이후에는 군대를 출동시켜야 되는데, 이것은 역대 군주들과 일치하는 점이다. 과거 한나라 말기에 천하가 분열되고 구주九州가 전도되자, 유비와 손권이 이 기회를 틈타 난을 일으켰다. 삼조는 주원을 평안하게 하기 위해 하루의 여유도 없었는데, 적에게 머물게 하고 평정시키지 못한 것이 몇 세대를 지나왔다. 다행히 종묘의 선조들에게 의지하고 대신들이 충성심과 용무로 정치를 보좌하여 사방으로 군사를 보내 파촉을 평정하였으니 많은 시간을 소모하지 않고 한 번의 싸움으로 이겼다.

근래 오나라는 쇠약하고, 통치는 혼란스럽다. 촉한이 평정되자 고립되어 원조가 없었으므로 속하의 교交, 형荊, 양揚, 월越 4주의 백성들은 조정에 의탁하려는 생각이 분분하다. 지금 교지의 적장 여흥은 반드시 삼군을 인솔하고 만리 밖에서 조정으로 귀순하고, 무릉읍후武陵邑侯의 상엄相嚴 등은 5현을 규합하여 조정에 받아주기를 청했으며, 예장豫章, 여릉군廬陵郡의 산민山民은 모여서 오나라에 반기를 들어 조북助北장군을 그들의 우두머리의 칭호로 삼았다. 또 오나라 손휴는 병들어 죽고, 통수권자가 바뀌었으며, 나라 안이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민심은 표류했다.

적장 시적施績은 적국의 명신이지만 회의를 품고 스스로 의심하고, 주군에 대한 마음과 한이 깊었다. 이와 같았으므로 많은 사람이 가까이 있는 자를 배신하고, 굳건한 뜻을 가진 자가 없었다.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멸망의 징조가 이처럼 분명한 적은 없었다. 만일 관군이 출동하여 남하하여 장강, 한수에 다다른다면 강남 백성들은 반드시 아이 손을 잡고 왕의 군대를 영접할 것이니 이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그러나 관군을 출동시키면 노역과 비용의 손실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조정의 위신과 덕망을 널리 알려 황제의 인자함과 신의를 나타내어 오나라의 백성들로 하여금 귀순과 융화의 이로움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상국 삼군사 서소徐紹, 수조연水曹椽, 손혹孫或은 옛날의 수춘에서 우리 군사에게 붙잡혔다. 서소는 본래 위정부爲政府 남릉南陵의 도독이었지만 재간이 탁월하고, 손욱은 손권의 지족支族(分家) 자손이지만 충실하고 선량하다. 지금 서소를 남쪽에서 돌려보내고, 손욱을 그의 부관으로 삼아 국가의 명령을 선양하고, 오나라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하라. 설명한 말은 모두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깨달을 수 있다면 정벌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조정에서 만든 적을 승리하는 책략이며 옛날부터 있어온 옳은 방법이다. 서소에서 산기상시를 겸임하도록 하고 거기도위와 도정후로 봉하고, 순욱은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郞을 겸임하도록 하고, 관내후의 작위를 주노라. 서소 등이 이곳에 하사받은 첩과 남녀 시비는 모두 스스로 가도록 하여 국가의 은혜를 밝히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돌아오게 할 필요 없게 조정의 위대한 신의를 널리 나타내라.”

20일 무군대장군, 신창향후 사마염을 진왕의 태자로 임명했다.
264년 둔전을 관리하는 관원을 없애고, 부세와 역무를 균등화 했으며, 각 군에 있는 전농(중랑장)을 모두 군의 태수로 삼고 전농典農 도위를 현령장으로 삼았다. 촉나라 백성들에게 국내로 옮길 수 있도록 권유하고 모집하였으며, 2년간의 양식을 주고, 20세가 되는 자의 부역과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안미현安彌縣, 복록현福祿縣에서 각각 가화嘉和가 자라난다고 보고를 올렸다.

265년 함희 2년 봄 2월 19일 구인현에서 신령스런 거북이를 잡아 바쳤다. 조환은 이것을 상국의 창고에 넣어두도록 했다. 25일 호분위 장수는 옛날 성도에서 여러 진영으로 말을 타고 가서 종회가 반역한 것을 알리다가 죽어 장수의 동생 장기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다.
여름 4월 남심지현에서 단 이슬이 내렸다고 보고했다. 오나라가 사자 기척紀陟과 홍구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5월 조서를 내렸다.
“상국 진왕은 널리 신神과 같은 생각을 펴서 천하에 행하였고, 무공을 진동시키고 빛나게 하여 위엄이 황량한 땅을 뒤엎었으며, 좋은 풍습으로 교화시키려는 노력으로 천하를 유력한 것이다. 강남(오의 영역) 지역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제와 교육에 우선적으로 힘썼으며, 무력을 억누르고 인의仁義를 숭상하여 조정의 위엄과 덕을 빛냈다. 포고가 전해진 결과, 오나라는 즉시 응하여 사자를 보내 공헌하고 귀순할 뜻을 나타내며 보옥, 비단, 진귀한 옥 같은 것으로 성의를 나타냈다. 그러나 진왕은 겸양함이 지나쳐 소유하고 있는 물품을 모두 기록하여 조정에 보내왔는데, 이것은 귀속된 오나라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바치는 성의를 존중하여 따른 것이 아니다. 오제 손호孫皓가 바친 각종 물품은 전부 진왕에게 돌려보내어 옛 뜻에 부합되게 하라.”

진왕이 완강히 고사했으므로 그만두었다. 또 진왕에게 명하여 면류관에 12개의 옥을 더하고, 천자의 깃발을 세우며 나가고 들어오는 경위警偉와 명칭을 모두 천자와 같게 하고, 금근거金根車를 타고, 6필의 말이 수레를 끌게 하고, 오시거五時車(다섯 계절의 색을 칠한 수레)를 부거副車로 설치하고 모두?頭, 운한雲罕을 두고, 음악은 팔일八佾(천자의 무악, 8명이 8열로 춤추는 것)의 무악을 연주하게 하고, 궁전에 종을 거는 대를 설치하도록 명했다. 또 왕비를 왕후로 세자를 태자라 하고, 왕자, 왕녀, 왕손의 작호를 이전의 의례에 따라 부르도록 했다. 30일 대사면을 행했다.

가을 8월 9일 상국 진왕이 세상을 떠났다. 10일 진의 태자 사마염이 왕위와 관직을 계승하고, 전국의 정치적 업무를 수행했다. 대우는 이전과 똑같았다.
8월 양무현襄武縣에서 거인이 나타났는데, 키가 30장 남짓 되고, 발 길이는 3척2촌이고, 백발로 황색 홑옷을 입고, 황색 두건을 썼으며, 지팡이를 짚고 백성 왕시王始에게 크게 말했다.
“지금은 노나라가 평정되어 태평한 시대가 되었구나.”

9월 모일 대사면을 행했다. 7일 사도 하증何曾이 진 승상이 되었다. 12일 표기장군 사마망司馬望을 사도로, 정동대장군 석포石苞를 표기장군으로, 정남대장군 진건陳騫을 거기장군으로 임명했다. 24일 진문왕을 안장시켰다.
11월 강거康居, 대완大宛이 명마를 바쳤으므로, 상국의 창고에 보내 귀속시켜 먼 곳에서 물건을 바친 공로를 전국에 나타내도록 했다.
 
12월 13일 위나라에 내린 하늘의 은혜는 영원히 떠나고, 천명은 진晉나라로 옮겨졌다. 모든 공경公卿, 사대부士具들에게 조서를 내려 남쪽 교외에 의식을 갖춰 설치하도록 하였으며, 사자를 보내 황제의 옥새, 수綏, 칙서를 받들어 진왕 사마왕晉嗣王에게 주도록 했다. 그 법식은 한위韓魏가 교차할 때의 예에 따랐다.

15일 사자를 보내 칙서를 받들도록 했다. 조환은 궁전을 나와 금용성金墉城으로 옮겨 기거했으며, 그 이후에는 업성의 관사에서 줄곧 기거하였다. 당시 그는 20세였다.
263년에 사마소가 등애와 종회에게 남쪽의 촉한 정벌을 명했고, 그해에 촉한을 멸망케 했다. 이듬해인 264년에 사마소가 서천을 정벌한 공으로 진왕晉王에 올라 제위를 찬탈하려는 준비를 마쳤으나 265년에 죽었다.

그 후 사마소의 맏아들인 사마염이 진왕의 지위를 이어받은 뒤 조환을 협박해 제위를 선양하게 했다. 사마염은 이에 반대하는 황문시랑 장절을 죽이고 마침내 즉위하여 서진을 세우고 조환을 진류왕陳留王으로 강등했다.

위세보魏世譜에 의하면 황제는 진류왕陳留王으로 봉해졌다. 58세 되는 대안大安 원년에 세상을 떠났고, 시호를 원황제元皇帝라고 하였다.
원황제를 평하여 말했다
고대에는 천하를 공고의 것으로 생각하고, 오직 현자들에게 주었다. 후세에는 왕위를 세습하여 적자를 후계자로 세웠다. 만일 적자가 없으면 방계 친족 중에서 덕행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였는데, 가령 한대의 문제, 선제가 그러했으니 이는 바꿀 수 없는 법칙이다. 그런데 명제는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사사로운 애정을 중시하여 어린 아이를 어루만지며 기르고, 그에게 천자의 자리를 전해주었고, 또 적합한 인물에게 위탁의 책임을 맡기지 않고 반드시 일족을 정치에 참여시킨 결과 조상은 주살되고, 제왕 조왕도 자리에서 쫓겨났다.

고귀향공 조모는 재간이 있고 총명하여 어린 시절에 완성을 보았으며, 의론을 좋아하고 문장을 애호하여 문제의 풍모를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됨이 경솔하고 분노에 차면 함부로 행동하여 끝내는 스스로 큰 재난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류왕(조환)은 정사에 관해 묻지 않고 재상이 정치를 하도록 하고 한위漢魏의 전례를 받들어 황위를 진晉에게 양도하였다. 그래서 진나라로부터 대국大國으로 봉해지고, 진왕조의 빈객이 되어 산양공山陽公(후한의 헌제)보다 더 총애를 받았다.

서진 치하에서 사마염은 조환에게 황족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조환에게 위 황실 제사를 허가하여 조환이 스스로 진 황제의 신하로 생각하지 않게끔 했다. 조환은 서진 혜제 때인 303년에 죽고 황제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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