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대장정 마친 손학규 정가 복귀

▲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정치실험’ 백일 민심대장정이 지난 9일 부산 자갈치시장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지지율 5%대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손에 쥐고 있는 손 전 지사. 하지만 이번 대장정을 통해 인지도 상승은 물론 대선주자로서 재평가에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특히 여권의 경계대상 1호로 거론되며 다크호스로 급부상한 손 전 지사의 행보를 점쳐 본다. 지난 9일 오전 부산에서 KTX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손 전 지사는 기자회견을 열고 한나라당 대선주자들과의 토론회를 제안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만나 국가적인 어려움에 대해 무릎을 맞대고 토론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나도 한나라당 대선후보 빅3” 여기서 ‘국가적인 어려움’이란 바로 북한 핵실험을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그 발언은 자신을 양강 대선주자들과 같은 반열에 놓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오만으로 보이지 않는다. 4개월 전까지만 해도 기껏해야 민주화운동 경력, 파주영어마을 정도를 떠올릴 정도에 불과했던 그다. 그랬던 것이 대장정 한 번으로 확 달라졌다. ‘생쇼’라는 비난을 딛고 102일 동안 93개 직종에서 서민의 삶을 체험한 손 전 지사는 1%대, 높아야 2~3%를 맴돌던 지지도가 5%를 넘보면서 붙박이 4위에 올랐다. 지난 5일 MBC 여론조사에서는 5.4%를 기록해 드디어 ‘마의 5%벽’을 깨고 말았다. 대선지지도에서 손 전 지사마저 정동영 열린우리당 전 의장이나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을 훌쩍 넘어서 당내 빅3가 모두 다른 당의 후보를 압도하는 유리한 대선구도를 만들어냈다. 상황이 이렇게 조성되자 ‘여의도 정치’에 매몰돼 있던 당내인사들도 손 전 지사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9월 16일 새정치수요모임·푸른모임·국가발전전략연구회 등 당내 소장파로 분류되는 의원들이 대거 대장정에 참여했다. 연이어 20일에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의 지도부가, 지난 10월 1일에는 강재섭 대표를 위시한 당지도부가 동참했다 당내 비주류 홍준표 의원은 9월 9일 “손 전 지사의 경우 한나라당 지도자 중 민주화운동을 한 대표적인 분”이라며 ‘저평가 우량주’론을 제기했고, 소장파의 리더격인 남경필 의원도 “손 전 지사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역할을 하겠다”며 ‘3각구도’론을 내놔 손 전 지사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손 전 지사에 대한 재평가는 한나라당 인사뿐만이 아니다. ‘대장정은 생쇼’라는 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지난 8월, 개혁성향의 언론 ‘한겨레21’이 한 발 앞서 ‘손학규의 길을 묻다’라는 제목의 특집을 실어 그의 대장정을 집중조명했다. 민병두 열린우리당 의원도 9월 13일 “손 전 지사가 우리당과 힘을 합치는 게 바람직하다”며 ‘손학규 외부선장론’에 불을 지폈다. “손 전 지사가 한나라당의 후보가 된다면 우리당 후보의 이미지가 중첩된다”며 경계신호를 보내는 것도 열린우리당이다. 심지어 지난 2일에는 민주당으로부터도 러브콜이 왔다. 김효석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념과 생각이 같은 그룹끼리 하나의 그릇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열린우리당 김근태, 정세균, 송영길, 임종석 의원, 한나라당 원희룡, 임태희 의원 등과 함께 손 전 지사를 중도개혁세력의 연대 대상으로 지목했다. 현실성은 낮아 보이지만 손 전 지사의 가치를 짚어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5%는 깼으니 다음 목표는 10%가 될 것이다. 박·이 후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30%를 넘나드는 마당에 10%를 넘지 못한다면 ‘3자구도’는 구호에 그칠 공산이 크다. ‘3자구도’는 경선 참여와 승복을 보장하는 ‘안전망’인 동시에 경선의 흥행소재로 여겨진다. 대장정으로 인지도를 높였다면 손학규 캠프의 다음 과제는 손 전 지사의 실무행정능력을 어떻게 돋보이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듯하다. 실무능력에 관한 한 손 전 지사만큼 풍부한 콘텐츠를 가진 인물도 드물기 때문이다. 손 전 지사의 후임을 맡은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손 전 지사의 업적은 지표로 나온다. 외자유치 액수, 수출의 규모, 창업기업 및 고용인력수 모두 논쟁의 여지가 없다”면서 높이 평가했다. 국회출입기자·중소기업인·대학교수·시민단체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한 소위 전문가집단 여론조사에서는 부동의 1위를 놓치지 않는 것도 손 전 지사의 잠재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다. 반면 손 전 지사의 결정적인 약점은 당내기반 취약이다. 앞서 말했듯 홍준표 의원과 소장파가 손 전 지사의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지만 사실상 ‘업무제휴’일 뿐, 아직 ‘선거캠프 합류’라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홍준표 의원은 이 전 시장과 소장파는 박 전 대표와 각각 ‘업무제휴’의 전력을 겪은 바 있다. 두 세력을 제외한 ‘손학규계’ 국회의원이라야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지역연고도 아킬레스건이다. 한나라당의 텃밭은 누가 뭐래도 영남인데, 손 전 지사의 출생지는 경기 시흥이다. 대구를 기반으로 한 박 전 대표와 포항 출신에 경부운하 공약을 밀고 있는 이 전 시장에 대적할 바가 못된다.
▲ 민심대장정 중인 손 전 지사
9일의 기자회견에서는 대선출마선언도 빠지지 않았다. 이미 지난 1일 박 전 대표, 이 전 시장이 공식적인 출마선언을 낸 마당이었다. 이 자리에서 “국가의 근본부터 살펴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를 꼭 만들고 싶다”고 말한 것은 사실상의 출마선언으로 해석되고 있다. 측근들이 이야기를 종합해볼 때, 손 전 지사의 다음 행보는 일단 ‘민심대장정 2탄’이 꼽힌다. 1탄 때는 ‘체험! 삶의 현장’이었다면 2탄 때는 시민과 정책을 토론하는 ‘토론대장정’으로 집약되는 움직임이 보이는 것이다. 손 전 지사는 지난 9일 “백일간 느낀 것을 정리해 국민과 함께 국가를 어떤 방향으로 바꿀지 깊이 있는 토론 자리를 만들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생활 정치인’ 다음은 ‘정책 정치인’이라는 이미지 전략이다. 따라서 10·25재보선 등 일련의 정치일정에는 ‘토론대장정’ 준비에 몰두하느라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른 후보군과의 연대 여부도 주목할 만하다. 손 전 지사는 지난 대선에서의 ‘노무현 신화’나 서울시장선거 때의 ‘오세훈 신드롬’의 재연을 꿈꾸고 있는 듯하지만, 5%의 지지도로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킹’이 아니라 ‘킹메이커’이기 때문이다. 만일 손 전 지사가 박 전 대표나 이 전 시장 둘 중 하나의 후보와 손을 잡는다면, 당내경선의 구도는 달라질 것이다. 총리를 담보로 ‘빅딜’을 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도 이미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손 전 지사의 ‘개혁적’ 이미지 때문에 일각에서는 범여권 오픈 프라이머리 출마나 12월초 본격적으로 가동할 것으로 보이는 정동영-김근태 연대에의 합류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당내 후보와의 연대설과는 달리, 여권 이적설에 대해서는 손 전 지사 본인이 일말의 가능성조차 단호하게 부인하고 있는 상태여서 실현성은 크지 않다. 손 전 지사의 가장 큰 무기는 ‘젊음’이다. 차기 대선 때는 일흔이 넘을 이 전 시장과 달리 이제 쉰아홉인 손 전 지사는 조바심낼 필요가 없다. 경기도지사 때도 재수를 거쳤다. 적절한 시점에 인상적인 페어플레이를 선보이고 이미지와 콘텐츠를 착실하게 쌓아간다면, 차기 대선가도 때는 지금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을 수도 있다. 정치실험의 모범으로 남을 듯 손 전 지사의 대선 행보는 아직 미지수지만, 적어도 이번 대장정은 한국정치에도 의미 있는 실험이 가능하다는 사례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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