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차례동안 1658만명, 민주주의 역사 새로 쓰다

▲ 5차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해 11월 26일엔 전국적으로 190만 인파가 모였다. 남대문 인근에서부터 청와대 인근까지 셀 수 없는 인파가 모여들었다. (사진공동취재단)
[ 시사포커스 / 고승은 기자 ] 전대미문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결국 박근혜 정권은 무너졌다.
 
지난해 10월 24일 JTBC의 ‘태블릿PC’ 보도 이후 ‘국정농단’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박 전 대통령은 이같은 상황에도 모든 책임을 최순실씨에게 떠넘기며, 자신은 국정농단과 무관하다는 취지의 주장만을 반복하다 여론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하야하라는 들끓는 여론에도 역시 귀를 막았다.
 
지난해 10월 29일 3만명의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으로 모이며 ‘박근혜 하야’를 촉구한게 시작이었다. 광화문 광장에 민중총궐기 집회 이후 사람들이 모인 것은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도화선에 불과했다. 참가자의 규모는 갈수록 커져갔다. 지난해 11월 5일(2차 집회)에는 광화문에 20만의 인파가 모였다. 세월호 집회 때에 비해서도 몇 배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이다.
 
이 와중에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박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헌정 사상 최저치인 5%를 찍는 ‘전후무후’한 기록을 세웠다. 부정평가도 90%에 달할 정도였으니, 시민들의 격노는 정말 대단했던 것이다. 언론에 게이트 관련 소식들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쉴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 국회를 움직인 시민들
 
그 다음주(지난해 11월 12일, 3차 집회)에는 광화문 광장에 100만 인파(전국 106만명)가 몰렸다. 그 다음주(지난해 11월 19일, 4차 집회)에도 전국에는 96만 인파가 모였다. 당시엔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이 “촛불은 바람불면 꺼진다”는 발언을 하다 여론의 거센 비난을 샀던 때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광화문 광장에서 ‘꺼지지 않는’ LED 촛불을 드는 사람과 파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 다음주 5차 촛불집회가 열린 11월 26일엔 전국적으로 190만 인파가 모였다. 남대문 인근에서부터 청와대 인근까지 셀 수 없는 인파가 모여들었다. 단일 집회로서는 말할 것도 없이 역대 최다 규모였다. 당시엔 주차돼 있는 경찰버스에 시민들이 꽃 스티커를 붙이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도,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29일 대국민담화에서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 결정에 맡기겠다"며 국회에 공을 넘기는 꼼수를 부렸다. 그러면서 자신의 모든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면서 12월 2일에는 탄핵을 처리하는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이 일었다.
 
하지만, 이같은 꼼수에 새누리당 내 비박계 의원들이 갈팡질팡하고 국민의당이 한발 물러서면서 국회는 2일 탄핵안 의결에 실패했다.
 
그러자 12월 3일 열린 6차 촛불집회에는 전국적으로 232만명이 모여 종전 기록을 또다시 경신했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비박계 의원들도 탄핵 전선에 합류했다. 결국 ‘박근혜 탄핵소추안’은 12월 9일 국회서 찬성 234표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됐다.
 
◆ 계속해서 광장 지킨 시민들
 
박근혜 직무 정지 뒤에도 수많은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을 계속 찾았다. 12월에 열린 7차~10차 촛불집회에도 전국적으로 70~100만 인파(주최측 추산)가 모여들었다.
 
특히 11차 촛불집회에는 세월호 생존학생들이 세월호 참사 1천일을 앞두고 시민들 앞에 서기도 했다. 이날 생존학생들과 희생자 부모들이 힘껏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같이 촛불집회에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지난해 12월 말 수사를 개시한 박영수 특검팀에도 힘을 실어줬다.
 
시민들은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측에 뇌물을 건넨 혐의를 받고 있는 재벌 총수들의 구속을 요구하는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한 온갖 ‘적폐’들을 지적하며 이를 해소해야 한다고 목소릴 높였다. 정경유착 해소나 세월호 진상규명, 선거연령 인하 등에 대해선 대다수 참가자들이 인식을 공유했다. 참가자들의 공감대와는 동떨어진 편협한 일부 구호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인식을 함께 했다.
▲ 박근혜 직무정지 뒤에도 시민들은 꾸준히 주말마다 광장을 지켰다. 사진은 지난 2월 25일 17차 촛불집회 사진. 사진 / 고경수 기자
새해 들어 영하 10도까지 떨어지는 강추위가 이어지자 12차(1월 14일) 13차(1월 21일) 집회 때는 다소 숫자가 줄기도 했지만 탄핵심판일이 길어지고 특검 수사기간이 촉박해지자 시민들이 다시 운집하기 시작했다. 2월 11일(15차)과 2월 18일(16차)엔 전국적으로 80여만명(주최측 추산)이 모여들었다. 특검 수사기간 종료가 임박한 25일에는 100만명이 넘게 운집했다.
 
10일 헌재의 탄핵심판 선고를 앞둔 지난 4일(19차 집회)에도 전국에 105만명이 모여 헌법재판소에 탄핵 인용을 거듭 촉구했다. 결국 10일 박 전 대통령은 헌재의 탄핵 만장일치 ‘인용’ 결정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됐다.
 
◆ 명예혁명, 그 완성을 향해
 
파면이 결정된 다음날인 11일 화창한 봄 날씨 속에서 20차 촛불집회가 열렸고 전국엔 약 70만 인파가 모여 ‘축제의 장’을 열었다. 134일간의 대장정만이었다. 특히 이날 오후 7시경에는 ‘촛불의 승리’를 자축하는 폭죽이 하늘을 수놓았다. 또한 광화문광장 무대에선 촛불승리 콘서트가 열렸다.
 
단일 사안으로 20차례의 촛불집회동안 총 1천658만명의 인원이 참가하는 전후무후한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해당 집회 중 연행자가 생긴 일도, 인명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 집회가 끝나면 언제나 거리는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집회 후에 시민들은 끝까지 뒷정리를 하며 깨끗한 뒷정리를 했다.
▲ 파면이 결정된 다음날인 11일 화창한 봄 날씨 속에서 20차 촛불집회가 열렸고 전국엔 약 70만 인파가 모여 ‘축제의 장’을 열었다. 이날은 폭죽이 하늘을 수놓았다. ⓒ 뉴시스
이같은 촛불집회의 뒤에는 서울시도 상당한 공헌을 했다. 촛불집회 규모가 확산되자 광화문광장 인근에 시·자치구 등 직원을 배치해 시민 안전과 편의를 지원했다. 지난해 11월 12일 3차 집회부터 11일 20차 집회까지 현장에 직원 1만 5천여명(연인원)을 투입했다. 같은 기간 구급차, 소방차, 청소차량 등 각종 장비도 1천대 넘게 지원했다.
 
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집회장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이자 집회마다 대형 쓰레기봉투 1천~2천장을 나눠줬다. 생리현상 해결을 위한 이동화장실도 10여 개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 청계광장 등 인근에 설치했다. 아울러 집회 시간 전후해 쏟아지는 인파를 위해 광화문역이나 시청역, 안국역, 경복궁역 등에 안전요원을 배치했다.
 
아울러 광화문광장 인근 건물을 설득해 총 200개가 넘는 화장실을 확보해 시민에게 개방했으며, 미아·분실물 신고를 위한 안내소도 매주 운영했다. 또한 귀가 시민의 교통편의를 위해 지하철과 버스 막차 시간을 연장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10일 ‘박근혜 탄핵’ 인용 직후 회의에서 "촛불집회에서 단 한 번도 사고가 없던 것은 우리 국민의 성숙한 역량과 우렁각시 같은 서울시 직원들의 노고 덕분“이라고 극찬했다.
 
넉 달 넘게 진행됐던 시민의 ‘명예혁명’이었다. 이같은 ‘명예혁명’에 주요 외신들도 칭찬의 목소릴 내고 있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지난 오랜 기간 쌓여왔던 적폐를 청소하고,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치유하려면 얼마의 세월이 걸릴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첫 단추를 꿰는데 성공한 만큼, 향후 과제를 하나씩 해결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을 충분히 얻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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