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승자 없는 ‘완산벌 혈투’

▲ 고건 전 국무총리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정계 개편 카드를 꺼내들었다. 김 의장은 20일 “이대로 가면 정권 교체 당한다”며 “한나라당의 수구보수대연합에 대응하는 민주 개혁 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번 발언은 고건 전 총리와 정동영 전 의장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이다. LA를 방문 중인 고건 전 총리도 입을 열었다. 21일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연말에 정치질서에도 구조조정하는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이다. 고 전 총리는 대선 출마에 앞서 중도실용개혁세력의 연대를 주창하고 있다. 8월말 희망한국국민연대(희망연대)를 출범시킨 것과 이번 미국 방문도 대선행보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고 전 총리가 10월 25일 치르는 국회의원 재보선에도 개입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공교롭게도 10월이라는 시점은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독일에서 귀국하는 일정과 겹친다. 정 전 의장은 5·31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의장직을 물러나 독일 베를린자유대로 연수를 떠났었다. 정 전 의장의 귀국에 맞춰 정동영계가 다시 결속하는 분위기다. 정동영계 의원들이 1일 정 전 의장을 공항으로 대거 마중나갈 예정이고, 정동영계 친노조직인 국민참여1219도 최근 사업계획을 밝히고 조직 역량 강화와 안티 조선 운동의 고삐를 부여잡았다. ◆전북 지역의 정치적 의미 두 사람의 동시적인 행보가 이목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 이들이 같은 전북 지역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고 전 총리의 태생은 서울 마포지만, 부친의 고향이 전북 군산인 탓에 호남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본인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세대는 아버지 고향 따라가는 것 아닌가”하고 강조한다. 전북 순창 출신으로 15대와 16대 총선에서 전주 덕진을 지역구로 출마한 정 전 의장은 명실상부한 전북 출신 정치인이다. 같은 호남이라도 광주·전남과는 달리 전북은 유권자수가 상대적으로 적고 김대중 전 대통령 같은 대형 정치인을 배출하지 못해 정치적 지지기반으로서의 효력은 미약한 편이다. 그러나 개혁세력의 전통적인 표밭으로 고 전 총리와 정 전 의장으로서는 무시할 수는 없는 지역. 한 마디로 전북을 지키지 못한다면, 다음 대선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게 될 호남 전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만약 고 전 총리나 정 전 의장이 대선 연대에 성공하지 못하고 이 지역을 상대 후보에게 빼앗긴다면 물경 90만표 이상의 손실이 발생하는 셈이다. 물론 전북 지역의 정치적 유력인사는 두 사람 외에도 있다. 우선 6선의 김원기 전 국회의장이 있고, 장영달 열린우리당 의원과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도 정계 개편을 앞두고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두 ‘대선주자’의 고래 싸움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
▲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애초 앞서 나가던 것은 정 전 의장이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으로 갈려 패권 다툼이 치열하리라고 전망됐던 17대 총선에서 11개 해당 지역구에서 모두 열린우리당 후보들이 압승을 거둔 것은 탄핵 정국의 영향이 컸지만 정동영 대망론도 상당히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참여정부의 인기가 하락하고 고 전 총리가 대선후보의 물망에 오르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5·31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전북 도지사에 김완주 후보를 당선시켜 수성은 했지만, 기초단체장 14석 중 10석을 민주당과 무소속에 내줬고, 광역의원은 34석 중 20석을 획득하는데 그쳤다. 지방선거 열린우리당 참패는 참여정부를 향한 불만의 표출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전북만 놓고 보면 전북의 민심이 당시 열린우리당의 의장이던 정 전 의장을 버리고 고 전 총리에게 쏠린 결과이기도 했다. 최근의 여론조사를 보면 간극은 더 벌어진다. 꾸준히 20%대 지지율을 유지하며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경쟁을 벌이는 고 전 총리에 비해, 4%대를 넘기지 못하는 정 전 의장의 지지도는 초라할 정도다. 5·31지방선거를 앞두고 시행된 여론조사에서는 고 전 총리(44%)가 정 전 의장(19%)을 더블스코어로 앞섰으니 지금은 더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최규성 열린우리당 의원도 6일 “전북 지역에서 고 전 총리가 정 전 의장보다 훨씬 인기가 높다”고 말한 바 있다. 고 전 총리와 정 전 의장은 중도실용개혁이라는 비슷한 정치적 성향에 같은 지역기반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은 현재 대선레이스에서 각각 2,3위와 5위를 달리고 있는 주자로, 범여권후보군에서는 가장 높은 지지도를 보이는 ‘오픈 카드’다. 둘의 지지율을 합치면 한나라당 이 전 시장이나 박 전 대표의 지지도를 능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향후 대선행보에서 연대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는 없을까? 글쎄. 3월 12일 회동에서 정 전 의장이 고 전 총리에게 5·31지방선거 연대를 제안했을 때, 고 전 총리의 거부로 무산된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신경전의 연속이었다. 3월 23일 두 사람은 전북을 나란히 방문해 “상대 약점을 공격하는 하이에나” 같은 막말로 공격을 주고받았고, 고 전 총리는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강현욱 전 전북도지사를 지지하기도 했다. 광주·전남을 장악한 민주당도 고 전 총리에 끊임없는 러브 콜을 보내고 있다. ◆고-정 연대, 한나라당 후보를 앞서는 시너지 효과 연대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대선가도에서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에게까지 밀린 정 전 의장측은 최근 “누구라도 한나라당을 이길 수 있으면 상관없다”며 킹메이커로서의 역할론을 내세우고 있다. 정 전 의장이 전북 지역의 맹주 자리를 고 전 총리에 양보하고 대선에서 연대하면 못할 것도 없다는 관측이다. 고 전 총리의 입장에서는 열린우리당의 지지세력을 온전히 흡수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남지만 손해 볼 일은 없는 장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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