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소녀'에 대한 남성들의 끊임없는 집착, 스크린에 투영된 형태를 통해 분석해보자

최근에는 '원조교제'와 같은 사회현상을 야기시켜 큰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의 세칭 '영계 밝힘증'은 아마도 영원히 사그러들지 않을 듯 싶다. 생식본능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정신적 보상 차원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간정신의 투영을 이루는 문화예술계도 이미 남성들의 이런 기현상을 목격하고 지난 수백년간 이를 옮기려 애써왔으며,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나보코프의 소설 "로리타"를 먼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로리타 콤플렉스'라는 학술용어까지 탄생시킨 나보코프의 소설은 그간 쉬쉬하던 문제를 적극적인 토론의 장으로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현대 문화예술계에 '인간본성과 이를 제어하는 윤리의 문제'를 언급하는 데 있어 쉽게 차용될 수 있는 코드를 만들어낸 셈인데, 이런 현대적 관점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아마도 20세기를 장악해낸 신종 예술형태인 '영화'일 듯. 이번에는 이들 '로리타 콤플렉스'를 주축으로 한 영화들의 면모를 두루 살펴보며, 과연 '어린 소녀'에 집착하는 남성들의 사고체계와 그 양상은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남성들이 바라본 어린 소녀'란 과연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소녀'란 모두 '악녀', 그들 안에는 파괴욕구가 숨어있다 소녀는 많은 예술형태에서 '순수성'의 상징으로서 차용되어 왔다. 그러나 바로 그 '순수성'이 '유년적 불안정성'이라는 개념과 함께 녹아들어가면 곧 '소악마'적 형태로 변모된다는 대치적 상황을 특히나 '남성작가'들은 힘겹게 다루어내고 있는데, 영화 장르 내에서는 나보코프의 원작을 스탠리 큐브릭이 영화화한 "로리타"(1962) 이후 수많은 '어린 소녀와의 사랑'을 다룬 영화들이 이 노선을 걷고 있다. 멀리로는 런던 빈민가 출신의 15세 소녀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어머니의 '남자친구' 집에 얹혀 살면서 '어머니를 죽게 한 원흉'과도 같은 그와 그의 가족을 파멸시키려 한다는, 당시로선 가히 충격적인 내용을 다룬 앨리스테어 라이드 감독의 "베이비 러브"(1968)로부터 어린 소녀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이 결국 파멸로 이끄는 '퇴폐적 학살극'인 삐에르 쥬세뻬 무르지아 감독의 1977년작 "우리들의 사랑놀음", 그리고 돌발적이고 충동적인 정서체계를 지닌 14세 소녀가 '처녀 딱지'를 떼기 위해 수많은 남자들을 유혹하고 그들을 곧 절망에 빠뜨린다는, 전형적인 '소악마'의 이야기를 다룬 까뜨린느 브레이야 감독의 1988년작 "36명의 소녀" 등이 바로 이 '소악마'적 소녀에 대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 작품들은 모두 '불안정한 정서상태'의 대표격으로 '소녀'를 내세워, 개인적 불안정성이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이들을 파멸시키고 만다는 '정서적 학살극'의 상태를 묘사해내려 하고 있는데, 이런 일률적인 경향, 나보코프의 정서를 그대로 이어받은 방향성은 보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를 원하는 1980∼1990년대에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바로, 198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던 '섹슈얼 싸이코-스릴러' - 굳이 말하자면 에이드리언 라인의 "위험한 정사"(1987)를 그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 의 성격을 '소녀'의 틀 안으로 우겨넣어,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소녀가 장난처럼 벌인 중년남과의 애정행각이 스릴러적 형태로 변모해간다'는 전제의, 새로운 선정주의 시네마 구도를 완성시킨 것. 이 패턴은 캣 셰이 감독, 드류 배리모어 주연의 "포이즌 아이비"(1992)로 그 포문을 열었으며, '로리타 콤플렉스의 여신'으로 꼽히던 알리시아 실버스톤이 그 뒤를 이어 '세상을 놀래킨' 로리타 영화인 "크러쉬"(1993)를 발표, 같은 해에 드류 배리모어 주연의 '실화극' "에이미 피셔 스토리"가 TV 전파를 타고 방영돼 '정신병적 로리타 캐릭터'의 일대 붐을 형성해기도 했다. 이런 붐은 숱한 비난과 우려 속에 등장한, 나보코프의 원작을 35년만에 리메이크한 에이드리언 라인의 "로리타"가 '엄청난 실패'로 돌아가면서 서서히 소멸되어 가기 시작했는데, 1999년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아메리칸 뷰티"에 이르면, 얼핏 '요부'적인 성격을 띠고 뭇남성들을 희롱하는 듯 보였던 전형적인 '로리타형 10대 소녀'가 알고보니 그저 '어른인 척'하고 싶어하는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는, '소녀 대 남성'의 대결구도를 단박에 비웃어 버리는 테마가 가미되어, 한때나마 유행했던 이런 선정적인 방향성에 대해 나름의 '반성'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소녀, 그들에게 잘못이 없다 한 때 주로 구미지역에서 '베이비시터 영화'라고 일컬어지던, 선정주의 장르의 대표격으로 여겨지던 작품군이 바로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소녀'를 다룬 영화들이다. 첫 시작점을 꼽자면 "빌리 잭"(1971)이라는 희대의 'B급 사회파 무술영화' - 우스꽝스럽게 들리겠지만 당시 실제로 존재했던 트렌드이다 - 를 탄생시킨 톰 로울린의 "베이비시터와의 주말"(1971)을 들 수 있으며, 이 영화에서 처음 선보인 '응큼스런 중년남이 자신의 성적도발성에 대해 무지한 베이비시터에게 빠져든다'는 설정은 이후 수많은 드라이브-인 영화들, 비디오용 영화들을 거쳐 메인스트림 코미디 장르에서도 종종 차용하는 인기 아이템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특별히 '쟝르'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만한 독자적 위치를 잃어버린 상황이 되었는데, 1990년대의 양대 '로리타-아이돌' 중 하나인 알리시아 실버스톤의 1995년작 "베이비시터"는 바로 톰 로울린의 노선을 정확히 다시 밟고 있는 작품에 속하며, 결국 이 계열의 작품들은 뭇남성들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순진무구한 소녀를 다루어 뒤이어 언급할 '신화적 소녀상'의 연장선상 같은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이런 노선은 비단 선정주의 장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브룩 쉴즈 주연, 루이 말 감독의 1978년작 "프리티 베이비"는 뉴올리언즈 홍등가에서 자라난 열두살 소녀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욕망과 경제논리의 비극'을 담아내고 있으며, 베르뜨랑 블리에 감독의 "멋쟁이 아빠"(1981)는 '죽은 아내의 딸'에 대한 양아버지의 일방적인 사랑 - 나보코프의 영향이 과연 얼마나 절대적인 것이었나를 알 수 있는 전제이다 - 이 결국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다루어 비천한 '욕망'이 숭고한 '사랑'의 형태로 변모해가는 나름의 환타지를 구사해내고 있다. 한편, 요시하라 켄이치 감독의 "센레이"(1996)는 SF적 성격을 부여하여 '남성들의 욕망'을 다루어내고 있는데, 치명적인 피부병으로 인해 은퇴에 이른 한 여배우가 자신의 뇌를 십대의 딸에게 이식(!)시켜, '성인의 사고'를 지니고 있는 '소녀'가 탄생된다는 설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가 바라보는 남성들의 욕구체계는 다분히 우스꽝스런 것이고, 그녀는 이를 이용하여 그녀의 여러 목적들을 하나씩 달성해낸다. 얼핏 '소악마'로서의 소녀 이미지가 차용된 듯한 이 영화의 설정은, 실제로 '욕망'의 형태를 이용하는 전지적 여성이라는 입장을 부여시켜 전혀 새로운 종류의 '캔버스'를 만들어냈다 볼 수 있으며, 이 밖에 '소아기호증'에 시달리는 한 남성들의 힘없는 남성 이데올로기를 추적한 크리스띠앙 드 샤론즈의 "아이도둑"(1991) 역시 풍자적이고 냉소적으로 남성의 단순무지한 '욕망'의 형태를 담아낸다는 점에서 "센레이"의 중심주제와 궤를 같이 한다 할 수 있다. '소녀'는 곧 '여신', 가장 순결한 형태에 대한 추구 영화의 탄생으로부터 수천년도 더 전, 아마도 '예술'의 형태가 처음 확립되고 미학적 비젼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던 시점부터도 '여신' 이미지로서의 '소녀'는 꾸준히 차용되고, 묘사되어 왔다. 바로 '절대적 순수성'의 상징이자, '어른'의 추악함을 전혀 지니지 않은, 거의 종교적 이상의 집합체와도 같은 이미지가 바로 그것. 그리고 그런 '신성한 대상'으로서의 소녀에게 빠져들어 거의 숭배와도 같은 감정을 갖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영화 역시 '순수의 결정체', '여신'으로서의 소녀를 그 시작점부터 꾸준히 사랑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요소들이 남성의 '정신적 불안정성' - '소녀의 정신적 불안정성'이 아닌 - 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현대적 관점의 도입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해밀턴 감독의 "로라, 여름의 저승"(1979)에 등장하는 한 조각가는 자신이 지닌 '이상적 이성상'의 집합체였던 여성의 복제판이자,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나이와 일치하는 그녀의 15세된 딸에게 '숭배'에 가까운 흠모의 감정을 품는다. 그녀의 '실체'에는 전혀 관심없이 자신이 '보고자하는' 그녀의 모습만을 좇는 조각가의 모습은, 그대로 자신의 이상체를 자신이 '조각'하려는 피그말리온 신드롬의 대표적 사례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소녀'를 '숭배'하는 관점은 이후, 정신병적 징후의 일종이라는 관점에서 탈피하여 '보상심리'의 차원에서 해석되기도 했는데, 테드 데미 감독의 1996년작 "뷰티풀 걸"에서는 결혼을 앞둔 주인공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매력과 동경을 느껴 옆집의 소녀를 흠모한다는 설정을 도입하고 있으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스틸링 뷰티"(1996)에서는 어머니의 자살 이후 이태리를 여행하게 된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아, 거의 '순례자'의 이미지와도 같은 그녀의 여러 행보들을 아름다운 화면 안에 담아내고 있다. 얼핏 '성장영화'의 한 갈래처럼 여겨지는 "스틸링 뷰티"는,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소녀가 '성인여성'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닌, 모종의 '초월함'을 얻게 된다는 구도를 지니고 있기에, '여신으로서의 소녀'를 완성시키는 '과정'이라는 독특한 방향성을 내세우고 있는 작품이다. 이런 남성들의 '소녀 숭배' 욕구를 비웃는 영화도 물론 존재한다. "거기에 없던 남자"(2001)에서 코엔 형제는 한 소녀의 피아노 소리에 감명받아 그녀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성장'을 자기 삶의 목표로 삼게 된 한 이발사를 등장시킨다. 영혼을 울리는 예술가로서 소녀를 추앙하던 남자는 차 안에서 그녀가 '잘 대해준 보답'으로서 오럴 섹스를 제안하자 기겁을 하며 자동차 사고를 일으킨다. 결국 '자기 안의 여신'이 '보통 여성'으로 전락하고 마는 이 테마는 사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존재해오던 '로맨틱 코미디 공식' 중 하나였으며, 동시에 '일본 소녀만화'의 공식이기도 한데, 이들 작품들이 모종의 '비극'을 사랑의 '현실성'에 대한 테마로서 쉽게 해석해버리는데 반해, 아트 계열의 영화들은 '상상의 공간을 침범한 현실의 충격'이라는 관점으로서 이 기막힌 정서의 변환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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