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일 편집위원
지난 30일을 끝으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엿새간의 방한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갔다.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잠깐 사이에 그동안 야권 우세로 이어져오던 차기 대선 판도는 일거에 반전됐다.
 
반 총장의 의도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가 해명한 것처럼 방한 첫 날 내놓은 발언이 확대 해석되면서 그간 회자돼 오던 ‘충청대망론’이 실체화되기 시작했고, 언론은 그의 행보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후 사태는 과열 양상을 띠며 반 총장이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흘러갔는데, 언론은 방한 내내 반 총장을 향해 차기 대선에 대해서만 질문 공세를 벌였고 그가 국제기관의 수장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방한의 이유와 목적에 대한 모든 초점을 오로지 국내 정치에만 맞췄으며 심지어 이번 방한으로 반 총장이 부재 중인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조차 한국 기자들은 국제적 현안이 아닌 반 총장의 향후 거취에 대한 질문만 퍼부어 유엔 대변인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미 방한 첫 날 논란을 일으켰던 해당 발언 이후 반 총장 스스로 몇 차례에 걸쳐 자신의 발언이 와전됐었다고 일정 마지막 날까지 적극 해명한 것은 물론 어디로 이동하든 직설적으로 ‘충청대망론’에 대해 질의해오는 데 대해 침묵하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음에도 언론은 집요하게 몰아감으로써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공식 일정으로 이뤄진 반 총장의 방한을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지극히 ‘사적인’ 방한으로 비쳐지게 만들었다.
 
아직 사무총장 임기가 7개월이나 남은 시점이고 처리할 국제적 이슈도 여전히 산적해있는데다 반 총장이 자신의 거취에 대해선 임기가 끝나는 내년에 결정할 것이라 누차 강조했지만 국내 언론의 행태는 그의 의사나 국제적 지위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지 못한 채 보도 경쟁에만 열을 올리며 언론 스스로 맞춰둔 프레임대로 흘러가도록 부채질하기 바빴다.
 
이런 가운데 정치권 역시 중심을 잡기는커녕 언론이 띄우는 분위기에 휩쓸려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중에서도 줄곧 차기 대선 지지도 여론조사에서 자당의 후보가 1위를 유지해왔던 더불어민주당은 언론에서 ‘반기문 대망론’이 거론되자 유엔사무총장 퇴임 직후 정부직 진출을 제한한 유엔 결의문을 끌어오는 것도 모자라 ‘만일 대통령이 된다면 시궁창에 버리는 이름이 될 것’이라고 저주에 가까운 경고까지 내놔 뭇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반 총장이 여전히 임기를 반년 이상 남겨두고 있으며 아직 향후 거취에 대해 확정짓지 않은 시점임에도 우리 스스로 ‘한국의 쾌거이자 자랑’이라고 그간 칭송해오던 유엔사무총장이란 국제 수장을 ‘일개 국가의 대선’을 의식해 끌어내리고 맹비난하는 행태가 반 총장의 대선 출마 여부를 떠나 과연 온당한 처사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정권교체를 지상 목표로 내세운 야권이 강력한 경쟁 후보의 등장에 경계심을 드러내는 것도 일견 이해할 만한 부분이지만 앞으로 상황이 보다 분명해지고 반 총장이 유엔 사무총장의 임기를 마친 뒤 대선 출마를 공식화한 시점에서나 용인될 수 있을까 말까 한 반응을 현 시점에서 독설까지 퍼부으며 격하게 내놓는 것은 언론의 과열 보도에 휘둘려 스스로 옹졸한 속내만 내비친 꼴이라고 할 수 있다.
 
야당을 비롯한 일각에선 현재 유엔 사무총장직을 수행 중인 반 총장이 차기 대선 등 국내 정치를 의식했다고 해석될 만한 행보를 보이는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대선에 등판하지도, 할 것인지도 확정치 않은 반 총장을 무작정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임의로 재단하는 미성숙한 우리 정치권과 언론의 모습이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우습게 만들고 유엔 사무총장직의 격까지 떨어뜨리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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