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말하게 될 5.18 민주화운동은...

[시사포커스 / 강민욱 기자] 5·18 민주화운동을 하루 앞둔 가운데 광주 전역에서 추모 분위기가 고조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의 핵심 당사자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은 17일, 과거사에 대해서 입장을 정리해 회고록에서 밝히겠다고 밝혔다.
 
그밖에 어제 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존방식을 유지하기로 발표해 이에 해당 노래의 제창·합창 관련 찬반논쟁도 뜨거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 같은 상황에 5·18 민주화운동의 전개과정을 단순 열거하기보다 역사적 사례를 종합해 다수가 공감할만한 의의를 도출해 보고자 한다.
 
많이 알려져 있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사례를 먼저 들고자 한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은 전장으로 진격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역적’으로 몰려 한산도에서 한양으로 압송돼 목숨이 위태롭게 된 일이 있다. 이때 당시 임금 선조에게 우의정 정탁은 이순신을 변호하는 '신구차' 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
 
주목할 점은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됐고, 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됐다가, 광해군 때 다시 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고 정조 때에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됐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신의와 충성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중국의 이순신’ 악비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남송시대, 외적 금나라에 대항해 남송을 위해 많은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재상 진회가 누명을 씌워 막수유(莫須有-아마도 있을 것이다)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한다.
 
악비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구국의 영웅으로서 악왕묘에 배향되었다. 1914년 이후에는 중국에서 거의 신으로 추모되는 관우와 함께 무묘(武廟)에 합사되기까지 한다.
 
이렇게 엉뚱하게 역사 이야기를 하게 됐지만 이 같은 사례들이 주는 시사점은 존재한다. 즉 5·18 민주화운동은 우리의 후손들 그리고 후대의 역사가 반드시 평가할 것이라는 점이다. ‘충무의 호’가 추서된 두 명의 장군들이 먼 훗날 후손들에게 추앙과 애도를 한 몸에 받듯이 말이다.

한국 사회의 역사적 흐름도 결코 다르지 않다. '문민정부' 김영삼 정부는 취임 첫해 특별담화를 통해서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전격 규정했고 뒤이은 '국민의 정부' 김대중 정부도 5·18을 국가기념일로 격상시켜 5·18 민주화운동에서 죽어간 영령들을 위로했다. 

그뿐인가? 12.12 사태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 사건'으로 규정됐고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법정에 섰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 시민들을 진압한 공을 받은 진압군의 각종 상훈은 박탈됐고, 5.18의 정신을 추모하는 기념사업 등의 법도 제정됐다.

이같은 사실에 비추어 적어도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한국 현대사의 두 ‘거인’들은 5·18을 ‘민주화운동’으로서 '경의'를 표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대변인이던 윤상원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군인들이 밀려오기 전에 어서 도청에서 떠나기 바랍니다"

다음 날 새벽 그는 시민군들과 함께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말대로 수십년이 지나고 정권이 바뀌며 역사는 5.18 민주화운동에서 죽어간 시민들을 명예롭게 했고 많은 국민들은 경의를 표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명예회복은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자유는 피를 마시며 자라는 나무다' 라는 문구가 있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이 자신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문구다. 만약 단순 신체의 자유만이 아닌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이 향유하는 다양한 권리들이 ‘자유’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단 하루만큼은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도록 하자.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여 이땅에 민주화의 불씨를 살려낸 광주시민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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