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격투기에 민속씨름이 무너지고 있다

민족 고유의 운동인 씨름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모래판의 황태자’ 이태현(30)이 일본 종합격투기 프라이드에 진출한다. 은퇴를 결정한 후 꾸준히 프라이드의 구애를 받고 있던 이태현은 지난 8일 서울 중구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프라이드 주최사인 DSE사 사카키바라 노부유키 회장, 다카다 노부히코 총괄본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기자회견에서 프라이드 진출을 공식 선언했다. 3차례 천하장사를 차지하며 민속씨름의 간판스타로 이름을 날린 이태현은 이날 “씨름은 내 인생에 전부였다. 이제 그 길을 접고 프라이드에 진출하게 됐다”면서 “새로운 무대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격려를 부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태현의 프라이드 진출로 씨름 천하장사 출신 선수는 이미 K-1에 진출해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고 있는 최홍만에 이어 두 번째 선수가 됐다. 이태현이 프라이드에 진출하면서 받는 계약조건은 최홍만의 K-1 진출 계약금보다 액수가 더 많은 5억원에 2년 계약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태현은 그동안 고심의 흔적이 역력한 듯 “프라이드 진출을 앞두고 고민을 많이 해 살도 좀 빠졌다”면서도 “프라이드 측에서 처음 제의가 왔을 때 선수로서 열의가 불타 올랐다. 만약 씨름 대표로서 프라이드 제의를 무시하면 도망자라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당당히 맞서서 최고의 선수가 되고 싶었다”며 프라이드 진출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이유에도 일각에서는 이태현의 프라이드 진출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일고 있다. ◆현대삼호중공업, 이태현 계약 위반이다! 이태현의 프라이드FC 진출을 놓고 이태현과 전 소속팀 현대삼호중공업간의 법정싸움으로까지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현대삼호중공업씨름단의 김칠규 감독은 “이태현이 대학 강단에 서겠다고 말해 은퇴를 허락했는데 프라이드에 진출하기 위해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했다. 명백한 계약 위반이다”면서 법적 조치도 염두에 둔 발언을 했다. 특히 현대삼호중공업씨름단은 이태현이 계약 기간을 남겨 둔 상황에서 다른 종목으로 이적한 것이 선례로 남지 않을까 우려, 강경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이다. 씨름단 관계자는 “우리도 이태현의 진로에 대해 나름대로 걱정 을 하고 있다”면서 “일단 그에게서 다시 한번 진로를 확인하고 입장을 들어본 뒤 적절한 조치를 취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이태현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은퇴를 선언한 뒤 프라이드로부터 제의를 받았고 진출을 결심했다"며 결코 프라이드에 나서기 위해 씨름을 그만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또 그는 "프라이드 진출 보도가 처음 나왔을때는 아무것도 결정한 것이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체육관을 앞으로 만들어 훈련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소문과는 확실히 다른 부분이다. 기자회견 당시 프라이드측의 사카키바라 노부유키 DSE대표 역시 이태현과 처음 접촉한 것은 씨름 은퇴후인 7월이었다고 주장했다. 이태현은 현대삼호와의 법적갈등에 대해 "대화로서 풀어가겠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며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낙관했다. ◆도의적 책임은 면하기 힘들어 그러나 이태현의 전업에 대한 비난은 법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이태현의 이종격투기 진출에 대해 정희준 동아대 스포츠사회학과 교수는 “계약과 관련한 법적인 문제를 떠나 자신을 키워 준 씨름계를 떠나 종목을 바꾼 것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민병권 한국씨름연맹 홍보사업국장은 “이태현의 계약 위반 논란 은 소속 씨름단과 선수의 문제이기 때문에 씨름연맹 차원에서 특별히 간섭하거나 조치를 내릴 사안은 아니다”면서도 “이태현의 경우 지난해 이종격투기에 진출한 최홍만과는 사정이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프로팀인 현대삼호중공업의 간판스타로 향후 201 2년까지 재계약을 보장받았을 정도로 안정적인 지위와 프로씨름 의 간판 스타로서 어려운 상황의 씨름계를 생각한다면 결코 바람 직한 결정은 아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현역 최고의 씨름스타가 지도자의 길을 걷기 위해 은퇴한다는 소식에 아쉬움을 표했던 씨름팬 박정무(39·서울 강남구 신사동)씨 는 “이태현의 은퇴 선언이 프라이드 진출을 위한 방편이었던 것 을 알고 배신감을 느꼈다”고 비난했다. ◆일본 격투기에 무너진 민속씨름 이태현의 프라이드 진출을 놓고 민속씨름 최고의 영예인 천하장사 타이틀도 결국 일본 격투기의 돈에 무너지고 만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이 2004년 말 K-1(입식 타격기)으로 전향한 뒤 올 초 신창건설의 해체로 소속선수 3명이 또 K-1에 진출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민속씨름이 일본이 만든 격투기에 완전히 흡수된 형국이다. 씨름 선수들은 "뛸 대회가 없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말한다. 프로팀의 잇따른 해체로 프로 시스템은 붕괴됐다. 지난해에는 세 개 대회만 열렸고 천하장사 대회는 치르지도 못했다. 1983년에 시작된 민속씨름은 현재 아마와 프로가 통합으로 경기를 치르고 있다. 2004년까지 민속씨름은 '프로 대회'를 의미했다. 외환위기 전에는 프로팀이 8개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금은 이태현의 전 소속팀인 현대삼호중공업 씨름단이 유일한 프로팀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연맹에서는 씨름단을 만들려는 의자가 없어 보인다. 외환위기 이후 팀이 잇따라 해체되면서 선수들은 갈 곳이 없어졌다. 아마 선수들과 싸워야 하는 프로 선수들은 '이기면 본전, 지면 망신'인 대회에 출전해야 한다. 출전하는 대회가 없다는 이유말고도 일본 격투기 러쉬가 이뤄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돈’이다. 프로씨름 선수 가운데 이태현은 고액 연봉자에 속했다. 그의 올해 연봉은 8000만원이다. 선수들의 주요 수입원인 대회 상금은 크게 줄어들었다. 지자체가 주관하는 장사 씨름대회의 우승 상금은 1000만원이다. 지난해의 경우 세 개 대회 모두 우승해야 300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종합격투기는 목돈으로 선수들을 유혹하고 있다. 최홍만은 2년간 10억원을 받는 조건으로 K-1에 진출했고, 이태현은 프라이드로부터 그 이상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속씨름 초창기 천하장사 출신인 이만기 인제대 교수는 "씨름을 발전시켜야 할 한국씨름연맹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며 "선수에게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남기만을 바랄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