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현재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경제 상황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불황’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물가상승률과 경제성장률은 매해 전망치에 못 미치고 주식시장은 ‘박스피’라는 오명을 떠안은지 오래다. 청년들의 취업절벽, 여전한 부동산 가격의 부담, 미미한 실질임금 상승, 자영업자들의 잇단 폐업 등은 불황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저기서 살기 힘들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서민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지난 한 해 우리나라를 휩쓴 ‘수저론’에서도 보이듯이 이 같은 불황은 어디까지나 일반 서민들과 일부 중산층의 얘기다. 재벌들이 ‘경제 살리기’라는 미명 하에 온갖 특혜를 받고 꼼수로 이익을 늘려가기 바쁘다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매년 대기업들은 어렵다고 호소하기 바쁘다. “올해 경기가 어려워 채용 폭을 줄였다”, “지난해 경기가 어려워 임금을 올리기 힘들다”, “수 년간 지속된 불황과 원가 상승으로 제품 가격을 인상할 수밖에 없었다”는 항변을 거듭한다.
 
대기업들의 외형은 갈수록 커져가고 재벌 총수들이 구축해 놓은 제국은 여전히 철옹성처럼 흔들리지 않고 있는데 어디 한 곳에서도 “지난해 좋았고 올해도 좋을 것” 같은 얘기를 내놓는 곳이 없다. 엄살도 적당히 해야 이해가 가는 법이다. 이미 그들은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정당한 노력의 대가라면 문제가 될 게 없겠지만 대부분 대기업들은 쥐꼬리만한 지분으로 그룹을 지배하면서 총수 일가 회사에 일감을 몰아줘 성장시키고 그 지분으로 경영권을 승계해주기 일쑤다. 실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액 배당을 받거나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과도한 임금을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회사 사정이 정말 어려워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미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법정관리네 구조조정이네 하면서 국민들의 막대한 혈세가 기업 살리기에 투입되고 재벌 총수 일가는 그저 약간의 사재와 약간의 지분을 잃는 수준에 그친다. 그마저도 나중에 대기업들이 다시 살아나면 보란듯이 재기해 다시 경영권을 쥔다. 이들은 온갖 특혜로 점철된 재벌들의 성장사를 벌써 잊어 버린 모양이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대기업들이 위기를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놓고 책임을 서민과 노동자들에게 전가한다는 점이다. 어렵다는 이유로 제품 가격을 올리고 임금을 덜 올려주고 채용을 줄이거나 기존 인원을 내보낸다. 올려야 할 법인세를 대기업들이 경제 위축 우려라는 핑계로 올리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면서 늘어나는 복지 재원은 서민 증세로 메꾸고 있다. 그런데도 구조적인 문제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대기업들을 옹호하고 대기업 노조를 귀족 노조라고 매도하고 있으니 배가 아파서 그러는 것인지 본인들이 총수 일가와 관련된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다. 이를 정치 이념과 연관시키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기형적인 재벌 총수 일가의 지배구조가 공고해져가면서 어느새 재벌들의 논리는 경제의 논리가 된 지 오래다. 일련의 흐름 속에 2000년 이후 14년 간 우리 경제는 74%나 성장했는데 실질임금은 그 반도 늘지 않았다. 1990년대까지 존재하지도 않던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는 이제 사회의 화두가 됐다. 특혜를 받아 왔고 또 받고 있으면 적어도 사회에 기여라도 하라는 얘기다. ‘기업이 잘 돼야 나라가 잘 된다’는 식의 논리에 빠진 대한민국에서 재벌 개혁을 외치는 것은 곧 서민들의 삶의 질을 상향시키는 일인데 이를 정치 이념과 연관시켜 원천적으로 논의 자체를 차단하는 것도 서민이라는 것이 개탄스럽다.
 
이런데도 최근 추진되는 노동개혁을 보면 대기업 임직원의 임금을 깎아서 임금 격차를 줄이거나 신입 채용을 늘린다든가 저성과자 일반해고를 도입한다는 얘기가 또 나온다. 경제가 어려운 게 정말 노동자 탓인가. 총수 일가는 대체 무슨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서민 감세나 대기업 증세까지는 못 하더라도 적어도 정부가 앞장서서 재벌 살리기가 곧 경제 살리기라는 식의 호도는 하지 말아야 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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