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개성공단 가동의 전면 중단을 선언했다. 만 15년의 세월 동안 남북경협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개성공단은 이미 수 차례 숱한 부침을 겪어 왔다. 더욱이 또 하나의 남북경협의 축인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상황에서 개성공단 전면 중단 결정까지 내려지면서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개성공단이 아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많은 국민들은 남북경협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지점으로 현대그룹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일명 ‘소 떼 방북’을 꼽는다. 고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후 펼쳐진 남북의 화해 모드 속에서 1998년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소 1001마리를 싣고 판문점을 거쳐 북으로 향했다. 같은 해 금강산 관광이 개시되면서 많은 이산가족들이 금강산을 찾기 시작했다.
 
이후 개성공단은 역사적인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인 같은 해 8월 남측의 현대아산과 북한의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맺은 ‘개성공업지구 건설 운영에 관한 합의서’로 그 첫 발을 뗐다. 2003년에는 100만평 규모의 현지 1단계 지구에서 개성공단 착공식이 열리고 부지가 조성되기 시작했고 2004년 6월 시범단지에 입주할 업체가 첫 계약을 체결했다. 같은 해 12월 입주업체는 처음으로 생산 제품을 반출했다. 주방기기 업체의 스테인리스 냄비였는데 일명 ‘통일 냄비’로 불렸던 이 제품은 서울 시내 한 백화점에서 이틀 만에 완판되는 등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노무현 정부로 들어선 후에도 개성공단은 착실한 성장을 거듭했다. 2006년 11월에는 북한 근로자가 1만명을 돌파했고 1년 뒤 두 배로 늘었다. 2007년 1월에는 누적 생산액 1억 달러를 돌파했다.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총 124개 기업이 입주해 있고 누적 생산액은 32억 달러에 달한다. 북한 근로자는 5만4000여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하지만 개성공단은 남북관계의 상징의 정도만큼이나 한반도 정세에 그 명운이 달린 신세였다.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 2008년 금광산 관광객이 북한군 초병에 맞아 숨진 사건이나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에 따른 5·24 조치 등으로 남북 관계가 지속적으로 냉각되면서 개성공단은 수 차례 부침을 겪었다.
 
금강산 관람객 사망 사건 후 전단 살포 등 대북정책에 반발한 북한은 상주인원 제한(880명) 조치를 내린 바 있다. 2009년에는 한미군사훈련을 이유로 세 차례에 걸쳐 육로 통행이 차단되기도 했다.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사건 이후 정부는 개성공단의 신규 투자를 금지했고 같은 해 11월에 벌어진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 당시는 개성공단 방북이 일시적으로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2013년 4월에는 북한이 한미연합군사훈련 등을 지목하며 개성공단 폐쇄라는 초강수를 내놨다. 당시 남북관계는 북한의 3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으로 크게 경색된 상황이었다. 체류하던 남측 인원은 모두 철수했고 실제 개성공단은 폐쇄됐다. 다시 가동된 시점은 같은 해 9월로 재가동되기까지 5개월이 소요됐다.
 
지난해 8월에도 북한군의 DMZ 목함지뢰 도발과 서부전선 포격 도발 등으로 개성공단은 또 한 차례 위기를 맞았다. 공단 출입경 인원이 제한되면서 공당 가동률이 떨어졌다. 이어 올해 연초부터 또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의 악순환이 지속되면서 이번에는 정부가 전면 중단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입주 기업들의 지원책을 신속히 발표했지만 70% 가량은 사실상 도산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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