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한 논리와 추진력,…“그는 대단히 바쁜 사람이다”

"그는 대단히 바쁜 사람이다. 그의 치밀한 논리와 추진력, 서민에 대한 애정에 대해 주변의 동료 의원들도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열린우리당 윤호중 의원에 대한 김한길 원내대표의 평가이다. 비록 17대 국회에 첫 입성한 초선의원이지만 당내에서 그의 이력은 이루 열거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다. 열린우리당 기획위원회 부위원장, 당 제4정책조정위 부위원장, 당 대미관계특별위원회 위원, 당 수도권발전 및 지역균형발전특위/경기도발전위원회 기획간사, 당 부동산기획단 간사, 국회 기업 도시 정책 포럼 간사 등이 모두가 그가 거쳤거나 현재 맡고 있는 이력들이다. 쉰 동이로 경기도 가평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윤 의원은 과거 민주화 운동을 거치며 대한민국 정치발전에 이바지 하고자 하는 꿈을 키워왔다. 그런 그가 새정치국민회와 청와대, 열린우리당을 거치며 정치인으로서 '치밀한 논리와 추진력', 그리고 '서민에 대한 애정'을 인정받기까지 결코 순탄한 길을 걸어온 것만은 아니다. 그는 끝없는 도전 속에 정치발전을 위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으며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현재 당내 초선의원들과 함께 완전국민경선제를 주창, 정치권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윤호중 의원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그가 계획한 일들을 들여다봤다. ◆ 쉰 동이로 태어나 철학도가 되기까지 윤 의원은 1963년 경기도 가평에서 쉰이 다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늦둥이로 태어났다. 마땅한 학습교재도 없던 시절, 그는 누나들이 다 배운 교과서를 들고 네 살에 혼자 한글을 익혔고, 여섯 살의 다소 이른 나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가히 신동소리를 들을만했다. 동급생들과 두 살 터울. 자칫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천성이 바른데다 친화력이 강했던 윤 의원은 학교생활은 물론, 학업에도 뒤지지 않는 수재로 칭찬이 자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원도 양양 태생으로 20대에 가평군에 정착, 공직자로서 한 지역의 발전에 이바지한 아버지의 청렴함을 가풍으로 이어받은 것. 아버지 윤학병씨는 가평면에서 부면장을 지냈고 대한노인회 가평군지회를 창립, 초대회장과 가평향교 전교를 지냈다.
▲ 지난 7월 16일 중부지방 집중호우로 인한 구리시 홍수피해 및 주민대책을 점검하기 위해 구리시청 재난본부를 방문후 한진그랑빌 아파트 앞에서 빗물에 불어난 왕숙천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특히 6.25전쟁 당시 수복지구였던 가평군에 가장 먼저 복귀한 공무원으로서 가평시장을 조성하며 고향을 버리고 월남한 이북도민들에게 상가 부지를 우선 분양해주면서도 당신은 한 평의 땅도 욕심내지 않은 청렴공직자로 유명하다. 그런 아버지의 청렴함은 윤 의원이 지금까지도 주변 동료들에게 인정받고 청렴하다는 소리를 듣게 해준 잣대와 같다. 윤 의원은 강원도의 명문인 춘천고등학교를 다니며 고민 끝에 인생을 의미와 삶의 이유를 찾는다며 2학년 재학중 휴학하고 철학을 공부한다. 이어 복학해 입시준비를 한 윤 의원은 서울대 법대에 갈 수 있던 실력에도, 원래의 목표인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 철학도의 길을 선택했다. 때문에 윤 의원의 아내 또한 이화여대 철학과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며 만날 수 있었던 것. 윤 의원은 입버릇처럼 "아내와 나는 민주화 운동을 함께 겪어 나온 동반자"라고 말한다. ◆ 시대는 철학도의 길을 걷지 말라고 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군사독재가 서슬 퍼렇던 1981년. 윤 의원은 서울대에 입학한 후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철학을 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서울대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학생운동을 주도했으며 수천명의 학생들 앞에서 "동지여, 서로 사랑합시다"라는 명연설로 '황색예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던 중 윤 의원은 서울대학생운동을 이끌다가 이른바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기관의 학원 내 프락치활동을 조사하던 학생들이 폭력을 행사해 발생한 사건으로, 윤 의원은 "당시 군사정권은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부를 무력화하기 위해, 폭력에 가담하지도 않은 학생지도자들에게 '폭력행위자'라는 누명을 씌워 감옥에 보냈다"며 "그로 인해 감옥살이를 했고 결국은 군대에도 가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 ▲2006년 정기국회를 앞두고 보좌진 워크샵
수감생활을 하며 윤 의원은 꼬마철학자의 꿈을 접고 정치의 꿈을 키웠다. 윤 의원은 "정치가 바로서지 않고서는 민주주의가 병들고 낡고 부패한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없으며, 남북통일 한국이 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윤 의원이 17대 총선에서 경기 구리에서의 출마를 고집한 것도 "구리시가 통일 한국의 꿈을 키우는 고구려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은 곳이기에 지난 총선에서 뼈를 묻는 마음으로 출마한 것"이라고 윤 의원은 밝혔다. 윤 의원은 대학재학시절 인문대 학보 '지양'의 편집장으로서 일찍이 언론, 출판분야의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민주화운동과정으로 인해 그 꽃을 피우지는 못했다. ◆ 등용문을 열다 평화민주당 기획조정실에서 일할 때. 김대중 총재의 갑작스런 부름을 받고 달려간 윤 의원은 연설문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꼼꼼하게 살핀 연설문은 이례적으로 무수정 통과하는 기록을 세웠으며 이후 윤 의원은 일약, 김 총재 연설문의 '스피치 라이터'로서 활약했다. 그러면서 윤 의원은 그 동안의 문필력을 인정받아 당 부대변인으로서 정권교체에 이바지했으며 나아가 지난 2000년 총선 뒤에도 계속 활동하는 등 전후 5년간 최장수 부대변인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옷 로비사건 등 국민의 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국민의 여론을 수렴해 국가정책으로 만들어내는 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발탁한 사람이 바로 그. 청와대 정책기획국장으로서 국정경험을 바탕으로 지역공약이었던 지하철 8호선 연장 공약을 현실화한 것도 윤 의원의 작품이다. ◆ 정치개혁의 선두 최근 열린우리당과 정치권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완전국민경선제 논의로 공방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 당내 초선의원들과 함께 완전국민경선제 도입을 주창하고 나온 것이 바로 윤 의원. 지난 총선 이후 젊은 원외지구당 위원장들의 모임인 '정치를 바꾸는 젊은 희망'의 리더로서 국민참여 경선제 도입 등 당 개혁에 앞장서온 가운데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외부선장론에 힘입어 그의 입김이 세지고 있는 것이다. 이화영 의원과 함께 친노직계로 분류되는 윤 의원은 친노직계 그룹인 의정연구센터의 일원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가 주장하는 완전국민경선제는 노 대통령의 발언과 맞물려 정계개편과 여권 대선주자 선출을 앞두고 적지 않은 파괴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에 윤 의원은 9일 당내 초선의원들과 함께 국회 의원회관에서 오픈 프라이머리를 주제로 한 토론회를 열었다.
▲ 우석대 한의대 지도교수와 한의대 학생 20명은 지난 7월 31일 구리시 동구동 노인회관 2층에서 무료한방진료 봉사활동을 했다. 이날 윤호중의원은 한의대 학생들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김한길 원내대표도 참석해 "우리당 대선 후보를 뽑는데 국민이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 오픈 프라이머리 도입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윤호중 의원은 발제문을 통해 "거듭된 재·보궐 선거와 지방선거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정치 발전을 추동해 온 세력으로서 무책임한 일"이라며 오픈 프라이머리 도입을 주장했다. 윤 의원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는 '자기 희생'을 통해 국민참여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대의명분을 얻고, 그 결과로 '집권'이라는 현실적 이익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윤 의원은 지난 2년간 국회 건교위에서 활동하면서 임대주택 100만호 건설을 주창했고 당 부동산 기획단 간사로 역할을 했으며 재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도시구조개선특별법을 대표발의하고 통과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당 경기도 발전대책위원회 간사를 맡으며 수도권 발전 및 지역균형발전 특위에서도 활동했고 관련 법안을 대표발의했다. 윤 의원은 국민임대주택 건설 사업은 단순한 주택정책이 아니라 서민복지 정책이라는 점을 강조, 국민임대주택 공급은 무주택 서민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이고 빼놓을 수 없는 과제임을 주창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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