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주중 베이징 한국대사관 영사부에 진입한 탈북자 처리문제를 놓고 한달간 계속된 한·중 외교마찰이 얼마 전 탈북자들의 서울도착으로 일단락 됐다. 이번 탈북자 24명의 서울행을 통해 탈북자에 대한 국내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의 대중 외교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마저 들려오고 있다. 올해 들어 어떠한 형식으로든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의 수는 무려 5백14명에 이른다. 이처럼 최근 탈북자 수가 급격하게 늘고 있는 것은 지난 '90년대 후반 북한을 이탈해서 중국 등 제3국에 수년 동안 머물던 탈북자들이 국제 비정부기구(NGO)들의 도움으로 한국대사관 등 외국공관을 망명행로로 활용해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이른바 "기획망명"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그들의 인권이 유린되는 현실에서 우리 정부의 탈북자대책이 미온적이라는 주장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돼 왔다. 특히 우리 정부는 그 동안 탈북자들이 머물고 있는 국가들과의 외교적 마찰을 의식해 탈북자문제에 있어 "조용한 외교"를 강조하면서 미온적으로 대처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번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 역시 정부가 중국 당국에 대해 지나치게 저자세로 일관해 온 탓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따라서 많은 탈북자 중에서 '선택받은 운 좋은 소수'만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고, 대다수의 탈북자들은 굶주림, 인신매매, 강제노역 등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면서 북한의 특무(체포조)와 체류국 공안당국의 추적을 피해 고달픈 도피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중국측은 지린성을 비롯해 동북 3성에 대거 체류하는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월경한 경제 유민으로 취급하고, 또 북한과의 협정에 의해 탈북자 본인의 의사에 반해 북한으로 강제 송환하고 있다. 게다가 북한은 구조화된 식량난을 감안해 북·중 접경 함경도 일대 주민의 중국행을 묵인하면서도 송환 탈북자를 처벌하는 등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즉 탈북자 문제의 원뿌리는 북한에 있는데도 오히려 중국 정부의 미숙한 문제처리 방식만을 국제사회에 집중 부각시킨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의 본질은 더 나은 삶과 자유를 위한 탈북 행렬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데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따라서 정부는 정치적 고려에 따라 탈북자들을 선별적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인도적 차원에서 입국을 희망하는 탈북자 전원을 수용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최근의 불미스러운 외교마찰을 계기로 중국에 대한 저자세 외교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지난해 6월 장길수군 일가족 7명이 유엔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에 진입한 데 최근에는 25명이 한꺼번에 스페인 대사관에 들어오거나, 독일 대사관과 미국 대사관에 탈북자가 진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 35명은 모두 제3국을 통해 한국에 도착함으로써 성공률 100%를 기록했다. 탈북자들이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해외공관에 진입할 경우 `3국추방 뒤 한국행'이란 공식이 성립되고 있는 셈이다. 중간 경유지도 동남아 국가인 필리핀 또는 싱가포르 등으로 굳어졌다. 사건 처리 방향을 놓고 취재에 애를 먹어온 각국 언론도 앞으로는 `공식'에 대입해 기사를 작성해도 될 듯하다. 이제 베이징의 재외공관은 탈북자들에게는 한국으로 날아갈 수 있는 유일한 구명줄로 바뀌고 있다. 1년 동안 벌어진 네 차례의 탈북자 사건을 바라보는 대부분 국민들의 마음은 비극 그 자체다. 네 사건은 대부분 주중국 한국 공관에서 반경 1㎞ 이내에서 일어났다. 탈북자들의 목적지는 하나같이 한국이건만 이들은 한국 대사관과 영사관을 찾지 않았다. 이들은 오랜 경험으로 한국 공관이 자신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국 대사관 또는 영사관 안으로 들어가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요행히 한국 외교관과 면담하더라도 "방법이 없다. 잡히지만 말고 열심히 살다보면 기회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훈계한 뒤 중국돈 이삼백위안(3만2천~4만8천원)을 손에 쥐어주고 돌려보낸다고 한다. 이 경우 탈북자들은 대부분 돈을 거절한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외국 대사관 진입을 노리게 된다. 당시 탈북자들이 느꼈을 법한 허탈감은 쉽게 짐작하기 힘들 것이다. 외국 대사관에 진입한 이후 탈북자들의 운명은 철저하게 중국 쪽과 해당 대사관의 협의에 달려 있다. 북한과 한국은 협의 과정에 직접 끼여들 수 없다. 이 과정에서 한국 대사관은 중국의 결정에 따라 탈북자들의 안전한 수송을 담당하는 들러리로 전락하고 만다. 한국 대사관의 이런 외교적 입지는 탈북자들이 중국 대륙을 벗어나기 전까지 일체 입을 벙긋하지도 못하는 지나친 저자세 외교로 표현될 만하다. 이런 모습은 최근의 네 차례 탈북자 사건에서 그대로 되풀이됐다. 최근 사건의 담당자인 대사관 정무과의 공사는 보도진에게 "모른다"로 일관했다. 이는 독일 대사관이 사건 발생 다음날에 "30대의 탈북자가 전날 밤 2.15m의 담을 넘어 들어왔으며 비행기 시간 때문에 오늘 밤을 넘겨 출국할 것"이라고 밝힌 것과 대조를 이룬다. 국제적인 관심사로 떠오른 사건에 대해 최소한의 확인조차 거부하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은 한국 외교의 입지를 스스로 약화시키는 인상마저 준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5월 26일 오전 독일 대사관 바깥에서 건물 외관을 촬영하던 국내 방송기자들은 `불법행위'를 이유로 중국 공안에게 필름을 빼앗겼다. 카메라 기자 6명과 특파원 1명은 외국기자증을 압수당한 상태에서 현지 경찰로부터 한 시간 동안 조사까지 받는 수모를 당했다. 베이징 공안국 5처 소속 외신기자 담당이라고 밝힌 공안들은 "사전취재 허가를 받지 않았다"면서 기자들이 독일 대사관 부근에 서 있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고 한다. 탈북자 행렬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 분명한 상태에서 이에 대한 대응 원칙이 무조건 숨을 죽이고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한국 대사관과 외교통상부가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며 `조용한 해결'만을 중얼거리고 있는 동안 탈북자들은 또다시 야밤에 다른 나라 대사관의 담장을 넘게 될 것이다. 정부는 남북이 함께 망신당하지 않도록 탈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좀더 진전된 원칙과 해결책을 서둘러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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