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람들이 혼동하는 말 중에 혁신과 개혁이라는 단어가 있다. 무엇인가를 변화시킨다는 기본 취지는 같지만 두 단어의 뉘앙스 차이는 사실 생각보다 크다. 혁신은 새로운 기술과 방법의 도입을 통해 꾀하는 변화를 일컫는 의미로 주로 쓰이지만 개혁은 기존의 것을 일사불란한 지휘 하에 뜯어 고친다는 의미가 더 크다.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실제 쓰일 때는 개혁이 조금 더 부정적인 뉘앙스가 크다.
 
헌데 공교롭게도 올해 우리나라의 화두는 개혁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불황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현실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으로 개혁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들었다.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 사이에서도 이슈가 되는 쟁점에는 항상 개혁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노사간의 갈등은 노동개혁, 연금 고갈 우려에 대한 해법은 연금개혁이라는 구호를 내세운다. 혁신의 취지가 빠진 개혁은 필히 갈등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일견 당연한 수순이다.
 
헌데 주요 화두 중 하나인 금융개혁만큼은 큰 갈등 없이 무풍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정부가 금융개혁을 외치며 은행들 길들이기에 나서자 마치 상명하복식의 군대 문화를 보는 듯 은행들의 눈치보기가 이어진다. 서민들의 생활은 물론 정부 정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는 금융권은 그 공공적 특성상 정부와의 일정한 보조가 필수적이긴 하다. 하지만 은행들의 일련의 행동들은 사실 도가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최근에는 영업시간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경제 정책의 수장인 최경환 부총리가 “4시에 업무를 마감하는 은행이 어딨느냐”는 화두를 던지자 주요 은행 CEO들이 일제히 은행 마감 시간을 늘릴 수 있다고 화답하면서 은행원들의 볼멘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사실 이 문제는 유연 근무제나 탄력 점포 확대 논의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었지만 최경환 부총리의 발언 다음 날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은행들의 영업 시간 확대 검토 방침은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대통령이 제안한 공익펀드에 대한 눈치보기는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처음 출시한 모 은행부터 잇따라 출시한 여러 주요 은행들까지 하나같이 직원들에게 가입을 강요했다는 논란에 휘말렸다. 일부 점포에서는 가입이나 가입 유치 실적을 관리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리고 역시나 해명은 일제히 ‘그런 적이 없다’는 식이다. 공익펀드 가입 유치 실적 늘리기가 도대체 금융개혁하고 무슨 상관이 있을까.
 
정부가 청년 채용 확대를 강조했더니 주요 은행들의 은행장 및 임원들이 연봉의 20~30%를 자진반납하고 그 돈으로 청년 채용을 늘리겠다고 한 것에도 보여주기식의 한심한 작태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은행들이 어떤 곳인데 겨우 그 돈이 없어서 청년 채용을 못하고 있었겠는가. 현재도 많은 은행들은 채용 여력이 없다며 아우성을 외치고 있다. 전 정부가 고졸 채용 확대를 주문했더니 한 은행은 고졸자들을 뽑고 보여주기식으로 홍보한 뒤 수 년 뒤에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던 사례도 있다.
 
의심의 눈초리가 짙어질 수밖에 없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금의 원천인 서민들에게 대하는 태도와 너무 달라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개혁을 기치로 걸고 은행권 길들이기에 나선 정부도 문제겠지만 정부 방침에 예스만을 외치는 것도 모자라 한 발 더 앞서 나가는 은행들의 행태도 문제다. 기준 금리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는데도 예금 금리는 대폭 내리고 대출 금리는 조금씩 내리는 행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강한 자에게 강할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적어도 은행들이 쓸데없이 앞장서서 비위 맞추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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