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한민국의 화두는 단연코 ‘갑질’이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에, 중소기업은 대리점에, 회사 내에서는 상사가, 음식점에서는 손님이 갑질하는 사례가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온다. 이렇다보니 ‘노오력’이나 ‘헬조선’ 같은 웃지 못할 신조어들이 대중 속으로 파고든 지 오래다.
 
헌데 이 같은 ‘갑질’의 시대에 반기를 든 ‘슈퍼을’들이 있으니 참으로 흥미롭다. 그것도 상하체계가 비교적 분명한 정부에서라니 이색적인 모습이다. 이 ‘슈퍼을’들은 상급기관의 방침을 따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반대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사퇴 압박에도 물러나지 않는다. 그들의 거취에 향배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슈퍼을’은 국민연금 최광 이사장이다. 국민연금은 500조원을 굴리는 글로벌 톱3 연기금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이 기금을 운용하는 기금운용본부의 수장의 연임을 불허한다고 통보했다. 장관까지 나서 기금운용본부장의 연임을 촉구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모양새다. 최광 이사장은 여기에 나름의 법적 논리도 갖추고 있다. 법에 임명권이 자기한테 있다고 돼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이 같은 법적 해석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갈 만한 부분도 있어 사태는 쉽게 진정되지 않고 있다. 상급 기관인 보건복지부가 산하기관에 끌려가는 모양새가 나오자 보건복지부는 사퇴 압박을 개시했지만 최광 이사장은 시간을 달라며 장고에 들어갔다. 이 모든 과정이 보도자료와 공문, 언론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위상이 흔들리는 순간이다.
 
‘슈퍼을’로 치면 재향군인회 조남풍 회장도 빼놓기 힘들다. 지난 4월 당선 이후 끊임없이 금권 선거 의혹과 부당 인사 논란을 겪은 조남풍 회장은 상급 기관인 국가보훈처장의 육사 선배다. 이 때문인지 국가보훈처는 조남풍 회장에 내내 끌려다니고 있다. 의혹이 제기된 인사들의 채용을 취소하랬더니 조남풍 회장은 이들을 잘랐다가 다시 채용했다. 국가보훈처는 특별 감사를 진행했지만 금권 선거 의혹은 손도 대지 않았다. 결국 금권 선거 의혹은 검찰로 넘겨졌다.
 
수 달여 동안 직무 정지를 고려하겠다던 국가보훈처는 아직도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고 있다. 상급기관이 맞나 싶을 정도다. 물론 법에 명확한 규정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떠밀리듯 각종 조치를 검토한다는 의견을 내놓는 것이 전부다. 이 와중에 특별 감사 당시의 감사위원이 조남풍 회장과 연관됐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국가보훈처는 더욱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한국투자공사 안홍철 사장은 이미 버티기에 성공한 지 오래다. 과거 고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야당 인사들에 대한 막말 논란으로 취임부터 논쟁의 중심에 섰던 그는 호화 출장 논란과 LA다저스 투자 관련 의혹으로 수 차례 사퇴 압박을 받았지만 꿋꿋이 버텨 냈다. 역시 해임을 추진할 만한 명확한 법적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여야는 물론 임명제청권자인 기재부 장관마저 사퇴를 압박하고 심지어 한국투자공사 폐지 움직임까지 일었지만 안홍철 사장의 뚝심은 여전하다. 국감에서도 여야 의원들의 질타가 이어졌지만 집중포화를 견뎌낸 그는 맷집을 키운 채 임기 완수를 위해 달려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각에서는 정부가 안홍철 사장을 방치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동양시멘트 입찰에 참여했던 중소레미콘사들이나 KDB대우증권 인수에 참여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대우증권 직원들이 보여준 ‘을들의 반란’이라면 모를까, 정부 내에서 ‘슈퍼을’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모양새를 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차갑다. 산하기관이라고 해서 부당한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국민들의 공감대를 얻을 만한 사안이 아니라면 단순히 하극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일련의 사태들이 모두 법적 조항의 미비로 발생한 것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정부조직법을 비롯해 기타 상하관계를 명시한 법들은 모두 국민들을 위해 일관된 정책을 펼치기 위해 제정된 법들이다. 그런데도 감독권과 지시권, 임면권 등이 제대로 규정조차 돼 있지 않은 법들이 부지기수니 제2, 제3의 슈퍼을들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재향군인회법은 심지어 국가보훈처의 포괄적인 감독권 조항이 올해부터 삭제됐다. 정부의 혼란은 곧 국민의 혼란이다. 하루 빨리 법적 조항을 합리적으로 손질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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