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거리를 지나다니다 보면 각종 음식점이나 카페들이 길가에 내건 메뉴판에 ‘아메리카노 2.0’, ‘까르보나라 스파게티 8.5’, ‘크리스피 치킨 1.3’ 따위의 가격표들을 종종 접하게 된다. 가격을 표시할 숫자가 길다는 판단 하에 점주들이 편의상 줄인 숫자다. 메뉴나 가계별로 기본 단위는 다르게 채용하고 있지만 모두 현재 쓰이고 있는 화폐 단위를 임의로 잘라내 새로운 기본 단위를 채택하는 일종의 화폐 가치 재정립의 사례다.
 
나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중장년층 이상이라면 누구나 어렸을 적 1원이나 10원, 100원들이 갖던 가치가 지금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제 성장에 따라 소득 수준도 그만큼 늘어났고 물가 역시 긴 기간을 놓고 보면 대체적으로 비례해 상승해 왔다. 상품과 서비스 가격들은 그만큼 커졌다. 어느새 천 원이 되지 않는 과자는 찾기도 쉽지 않다.
 
이처럼 똑같은 서비스의 표시 가격이 올라간다는 것은 돈의 가치가 그만큼 떨어져 간다는 얘기다. 적지 않은 나라들은 이럴 경우 화폐 가치를 재정립하곤 한다. 새 단위를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가격 뒤에 붙어 있는 0 몇 개를 떼곤 한다. 어느 날부터 100원은 1원으로 표시한다고 선언하는 식이다. 이른바 화폐 개혁, 또는 리디노미네이션(Redinomination)이다.
 
얼핏 보기에는 뭐 어려운 일일까 싶다. 그냥 모두가 100원을 1원 취급하면 되는 거 아닌가 라고 말이다. 우리 나라에서 유사한 사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을 비롯해 1953년, 1962년 등 이미 수 차례 실시됐다. 다만 당시의 화폐개혁은 액면 표시 방법도 환에서 원으로 또는 원에서 환으로 바꿨던 ‘디노미네이션’이라는 차이만 있다. 현재 논의되는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가치만 절하하는 방안이다. 큰 범위에서는 마찬가지의 효과를 갖는 화폐 개혁의 일종이다.
 
하지만 화폐 개혁이 가져오는 효과는 상상 이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선 전국의 금융·전산 기기들을 모두 교체해야 한다. 새 통화를 발행해야 하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액면가가 크게 낮아지면 부정 부패의 소지도 커진다. 300만원이던 월급이 3000원으로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1000원 하던 과자가 1원이 된다면 씀씀이도 커질 확률이 높다. 화폐 개혁의 가장 큰 부작용인 인플레이션 수반 가능성이다. 실제 노무현 정부 때도 화폐 개혁을 추진했다가 이 같은 이유로 결국 계획이 철회됐다고 한다.
 
이처럼 만만치 않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화폐개혁이 최근 국정감사에서 언급되는 해프닝이 있었다고 한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 총재가 온 국민의 시선이 쏠린 국정감사 자리에서 화폐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내부에서 논의가 제기됐으며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언급하자 순식간에 각종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화폐 개혁이 등장했다. 정치권과 경제계가 그 발언의 배경을 짐작하느라 하루 종일 들썩였던 것은 물론이다.
 
당일 늦은 오후 한국은행이, 또 바로 다음 날 최경환 부총리가 원론적 입장일 뿐이라고 진화에 나서 해프닝으로 끝나는 모양새지만 어떻게 한 나라의 중앙은행의 수장이 이 같은 중차대한 일을 중대한 자리에서 가볍게 언급할 수 있는지 궁금함이 가시지를 않는다. 통화 시장의 민감성은 상상 그 이상이다. 과거를 되돌아 봐도 손에 꼽을 정도의 사례밖에 없는 화폐 개혁을 언급할 때는 적어도 충분한 공론화를 통한 논의와 치밀한 분석, 정부와의 교감이 반드시 선행돼야 하는 것이 상식 아닐까.
 
일각에서는 일종의 ‘간보기’가 아니냐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부가 화폐개혁 논의를 슬쩍 흘리고 여론을 떠 본 후 반응이 좋지 않자 즉시 논의를 거둔 것 아니냐는 얘기다. 마침 지난해 금리 인하에 대한 생각을 놓고 다른 의견을 내놓던 최경환 부총리와 이주열 총재는 이후 한은이 연달아 네 차례 기준금리를 인하하면서 밀월 관계를 의심받고 있는 터다. 지난해 최경환 부총리의 ‘척하면 척’ 발언으로 불거진 의구심은 1년이 지난 올해 국정감사에도 화두에 올랐다.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는 사건이지만 만약 정말 두 ‘콤비’의 간보기였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가뜩이나 한국은행의 독립성과 중립성이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행이 정부의 꼭두각시가 되서는 곤란하다. 화폐 개혁처럼 온 국민들에게 큰 파장을 불러올 정책을 두고 벌인 합작극이라면 더욱 상황이 심각해진다.
 
중앙은행이 반드시 정부와 별개의 시각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되도록 모든 판단은 독립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통화정책 같이 민감한 분야가 정치적으로 이용될 경우 국민들이 감당해야 할 그 폐해를 떠올려본다면, 이번 중앙은행 총재의 화폐개혁 언급이라는 해프닝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뉴스다.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좀 더 신중한 한국은행의 모습은 아직 요원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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