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같은 전개, 다르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감흥

김기덕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손쉽게 느껴진다. 그는 같은 종류의 감수성과 더 이상 발전되지 못하는 빈약한 상상력을 지지고 매 편마다 무대와 상황의 변화만을 주는 '원-패턴' 작가에 속하며, 매번 같은 종류의 장점과 같은 종류의 단점을 지닌 '불완전한 작품'을 내놓아 더 이상의 발전적인 방향을 의도하지도 않는 듯한, 고집스런 '미완의 작가'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김기덕의 영화를 한 편 보았다면, 그의 영화 열 편을 본 것과 같다. 그에겐 분명 '작가적 스타일'이 확고히 구비되어 있지만, 그에게 '작가적 미래'란 없는 듯 보인다. 김기덕의 신작이자, 그에게 베를린 영화제 최우수 감독상을 안겨주어 세계영화계에서의 입지를 더욱 명확히 해준 영화 "사마리아"의 경우, 분명 이전의 김기덕 영화가 안겨주었던 일률적인 감흥에서 탈피하는 데 일정부분 성공하긴 했어도, 이것이 철저히 준비된 대체적 방안이라기 보다는 '사고' 또는 '잔꾀'를 통해 로 인해 다른 방향으로 선회되어 버린 듯한, 복잡한 케이스로 보여지고 있다. 이런 독특한 성격은 "사마리아"가 이전의 김기덕 영화들이 지녔던 고정적 발상과 방향성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김기덕 영화들이 한 데 응축하고 있었던 복합적 요소들을 세 갈래 - "사마리아"는 세 파트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 나누어 놓고, 이를 각 파트 별로 분할하듯 배치시켜 놓아, 전혀 다른 스타일과 방향성을 지닌 에피소드들이 '시간순'으로 전개되는 기이한 구조를 이뤄놓았기에 얻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사마리아"의 각 파트는 마치 세 명의 각기 다른 감독이 연출한 듯 완벽히 상이한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순차적 전개라기 보다 옴니버스 영화에 가깝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일단 이 세 파트의 성격에 대해 짚어보기로 하자. 첫 파트 "바수밀다"는, 가장 냉정하게 말해도 근래의 영상체험 중 가장 끔찍스런 것이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컨셉 자체도 고루하기 짝이 없고, 인물에 대한 이해와 깊이도 얄팍하다 못해 너덜거리는 수준이며, 연기 역시 인물의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는 배우들의 미숙함과 인물 흐름의 정리부족으로 인해 초등학교 학예회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촬영도 엉망, 편집도 엉망이며, 그 이음새나 인물들이 쏟아내는 대사들이 너무나도 조잡스러워 거의 의도적인 펑키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 파트에서 관객들이 느낄 수 있는 감흥은 '비현실성'의 극단이다. 인물이나 상황, 커뮤니케이션 과정까지 모든 것이 '현실적'이라 보기 힘든 것들이며, 마치 공중에 붕-뜬 듯,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고 공기 중을 부유하는 듯 보인다. 김기덕의 영화는 분명 이런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강조'된 듯한 느낌의 극단적인 사례는 도저히 이해불가능한 컨셉으로 이루어진 "실제상황"(2000) 외에는 없었다. 이것이 실제 연출상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건 그저 '오류'에 의해 발생한 일이건 간에, 관객들은 이 괴기스런 영상체험을 어떤 의미로든 절대 잊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에 반해, 두 번째 파트 "사마리아"는 '빈티지 김기덕'이다. 김기덕이 자주 그려내고 있는, 때로는 김기덕이라는 작가 자체를 상징하고 있는 극단적 갈등상황의 연출과 그 폭발, 해소의 과정이 그다운 굵은 터치로 힘있게 그려지고 있으며, 여러 아이러니컬한 상황과 인물들 각자가 지닌 고유한 - 그러나 어딘지 기이한 - 사고체계가 서로 맞부딪히며 일어나는 돌발상황들이 화면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우리가 보통 '김기덕의 영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요소로 꼽는 모든 것이 바로 이 "사마리아" 파트 안에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첫 파트에 당혹스러워 하던 관객들에게 '안도감'을 심어주는 것도 - 이것 역시 아이러니이다. 이 두 번째 파트야말로 모든 돌발적 요소들이 속출하고 있는 파트이기 때문이다 - 바로 이 시점부터인데, 김기덕은 이 "사마리아" 파트에서 인간의 내적 고통이 외부에 그대로 표출되어 버리는 '실체화'의 딜레마에 대해 박진감 넘치는 구조와 이얼의 에너제틱한 연기를 통해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으며, '고정적 갈등구조'의 해소 타이밍을 벗어나 이를 다른 방향으로 선회시켜 버리는 그만의 테크닉과 우발적으로 발생되어 버리는 어이없는 완결점의 제시가 가장 재기넘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있다. 세 번째 파트 "소나타"는 앞서 전개된 두 파트에 대한 '감정적 결론'을 길게 늘어뜨리고 독백하고 있는 파트로서, 김기덕의 이전 영화들이 강렬하고 열정적인 전개과정과 동시에 일정부분 부여해내던 '내적 고통의 사색' 요소를 극대화시킨 파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이전 영화들에서 굵은 선의 사건 사이사이에 끼워넣어져 효율적인 호흡구조를 이루어내는 데 일조했던 '사색'의 요소가 극단적으로 확장된 느낌의 "소나타"는, 김기덕의 영화세계를 통털어서 가장 이질적인 연출방식으로 이끌어졌을 뿐 아니라, 결국 영화의 내적 흐름에서 완전히 단절되어 '외따로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인물들은 얼핏 상징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의미한 행동양식에 의해 서로 소통하고, 별다른 내적의미가 없는 환상 시퀀스가 등장하기도 하며, 고의적으로 페이스를 늘어뜨리고 톤의 호흡구조를 망가뜨리면서 관객들에게 '사색할 시간', 또는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억지스럽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전의 파트들이 나름의 방향으로 쌓아올린 정서의 집중도를 일순간에 와해시키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설정된 정서를 새롭게 삽입시키려는 노력으로 보여지는데, 무리수가 따를 수 밖에 없는 계획이었던 만치 그 결과 또한 어지럽고 쉽게 정리되지 않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 세 파트를 거쳐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은, 실로 기묘한 정서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감정과 이성의 극단으로 치달아 관객들로 하여금 인간 정서의 가장 어둡고 침잠된 부분을 관통하도록 이끌어냈던 이전의 김기덕 영화들과 달리, "사마리아"는 정서의 흐름이 각각 단절되어 있는 혼란스런 구조를 통해, 자신의 '정서'가 제시하는 해답에 매달려 끊임없이 고통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피로한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영화의 피로감'을 전달하기 위해 관객들을 실제로 피로한 상태로 몰고가는, '가장 잘못된 방향으로서의 관객과의 소통'을 자신있게 표출하고 있어 작가의 방향성 자체에 반발감을 야기시키고 있기도 한 것이다. "사마리아"의 엔딩은, 비록 김기덕이라는 작가에 대한 평가가 가장 극단적으로 나뉘어지게 만드는 '직설적 상징'의 요소가 극명하게 드러나있기는 해도, 분명 미학적으로 독창적이면서 감정적으로도 절실하게 와닿는 아름다운 시퀀스였다. "사마리아"는 어찌 보면 이 한 장면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듯 싶기도 하다. 기괴한 파트 분할을 통해 스타일의 충돌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이 지닌 감수성의 체계를 확대/왜곡/재생산하여 새로운 느낌을 풍기려는 '잔꾀'를 부려보아도, 결국 "사마리아"를 지켜본 관객들에게 남는 것은 그의 '진심'과 '영감'이 접목되어 있는 이 엔딩 시퀀스 밖에 없으리라는 점은, 예술창작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되새겨봐야 할 부분일 것이다. 결국 김기덕은 김기덕이고, 그가 매번 빅맥처럼 매번 똑같은 맛과 모양새를 지닌 영화들만을 양산해 내더라도, 그의 '진심'이 담겨있고,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관객들은 그의 '똑같은' 신작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매년 한편씩, 20여편이나 비슷비슷한 영화들을 만들어낸 우디 앨런의 신작을 언제나 고대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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