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꾼들 사이에서 흔히 쓰이는 말들 중에 ‘그사세’라는 말이 있다. 한류스타 현빈과 송혜교가 출연했던 인기 드라마의 제목 ‘그들이 사는 세상’을 줄인 이 단어는 쉽게 말해 ‘그들은 우리와 다른 세상에 산다’는 걸 빗댄다. 탑스타들이나 재계 총수 일가의 호화로운 생활 등 보통 일반인들로서는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삶에 대한 동경을 반영한다.

하지만 주로 부러움과 동경의 표현으로 쓰이는 이 단어가 종종 부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올 때가 있으니 요새 롯데그룹 일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분쟁이 딱 그 상황이다. 정·재계는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요새 대세는 롯데가의 ‘그사세’다.

롯데그룹의 형제 간 경영권 분쟁이 점입가경으로 치달으면서 온 국민들의 롯데가의 모든 것을 알게 될 태세다. 재계 5위의 그룹이 그간 신격호 총괄회장 일가의 ‘손가락 경영’으로 지배되고 있다는 점이 새삼 주목받는가 하면 이복 누나 신영자 씨나 셋째 부인 서미경 씨의 근황이 새롭게 재조명되는 등 가족사의 면면이 매일 같이 해부돼 공개되고 있다.

사진조차 구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존재감이 미미했던 형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은 아버지와 친족들을 상대로 반기를 든 동생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막상막하의 혈투를 벌이면서 막장 드라마 주인공급의 인지도를 획득했다. 롯데그룹은 지배구조 실체가 밝혀지면서 반일 감정의 역풍을 맞자 제2롯데월드타워에 대형 태극기를 거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물론 수 많은 언론들이 고생스러운 취재를 통해 발굴해 낸 내용들을 보도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지나친 대중적 흥미 위주의 접근은 지양해야겠지만 수 조원을 걸고 벌이는 운명적인 혈투가 언론에서 어느 정도 가십성으로 흘러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우리는 현대가의 형제의 난을 겪었고 금호그룹의 형제간 분쟁을 지켜보고 있다. 많은 그룹에서 경영권 분쟁은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고, 대중들은 어느 정도의 선까지가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경영권 분쟁을 벌이는 당사자들이 자극적인 요소를 대동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얘기다. 신동빈 회장의 롯데그룹은 사태 발생 초기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구순이 넘은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의 건강이상설을 경영권 분쟁의 핵심으로 제시하고 있다. 단순히 건강이 쇠약해졌다는 얘기가 아니다. 관계자들의 입을 빌려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얘기는 물론이고 시쳇말로 오락가락한다는 표현까지 동원되고 있다. 치매끼가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물론 전국민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재계 굴지의 그룹에서 경영권 분쟁을 벌일 때는 그만큼 가능한 모든 수를 총동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했을 것이다. 장남이 아닌 차남으로서 아버지와 친족들을 돌리게 된 정당성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유산 상속을 놓고 친족간의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일은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인신공격은 물론이고 물리적 힘까지 동원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도 전국민이 지켜보고 있는데 아버지의 치매설을 자꾸 흘리는 것은 좀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롯데 측이 정확하게 치매라고 한 적은 없지만 언론에서는 고위 임원의 입을 통해 신격회 총괄회장이 자꾸 판단이 오락가락한다든지 정확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든지 하는 말이 흘러나온다. 심지어 한 롯데 임원은 신격호 총괄회장이 침을 많이 흘리더라는 얘기까지 했다고 한다. 대체 수 십여년 간 그룹을 이끌고 왔던 창업주이자 아버지한테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물론 신격호 총괄회장의 의사 표시가 경영권 분쟁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신동빈 회장 측에서는 여전히 그룹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지분을 들고 있는 신격호 총괄회장의 의사를 주주총회에서 무력화시키기 위해 신격호 총괄회장의 의사 결정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소견을 받아내야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때 가서 소견을 받아 내면 될 일이다. 전국민이 신격호 총괄회장이 치매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은 지나치다. 신동빈 회장 본인이 얘기한 적은 없지만 내부 기강 단속에 힘쓰면서 사장단과 노조가 잇따라 지지선언을 하는 걸 보니 적어도 적극적으로 막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호소하는 것은 본인의 발등을 찍는 일이기도 하다. 수 년 간 롯데그룹을 장악하는 과정이나 연초 신동주 전 부회장이 내쳐지는 과정에서 본인에게 힘을 실어준 장본인이 신격호 총괄회장이라고 말해 왔던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불과 수 달여 전만 해도 신격호 총괄회장의 뜻을 받들어 열심히 한·일 롯데를 이끌겠다고 다짐하던 신동빈 회장이다.

형제간 다툼이 격화되더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 더구나 노인들의 치매에 대한 두려움은 젊은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상상 이상이다. 누구에게 승계의 정당성이 있고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차치하고서라도,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에게 치매끼가 있다는 취지의 인터뷰가 롯데그룹 임원들의 입을 통해 하루가 멀다하고 나오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상당히 불편한 일이다. 사태가 사태이니만큼 조용히 분쟁을 벌인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품격은 지켜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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