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정서'의 오딧세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작가들이 존재하고, 이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 역시 각양각색이다. 도발적인 정치적 이슈를 주장하는 이가 있는 반면, 있을 성 싶지 않은 선량한 캐릭터들을 통해 삶의 여유와 긍정적인 비젼을 제시하려는 이들, 초현실적인 묘사를 통해 자신이 뿜어낸 상상력의 극치를 전달하려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 감정의 근원과 양상에 대해 추적하는 이들도 물론 존재한다. 거장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딸이자, 지난 1999년, "버진 수어사이드"를 통해 성공적으로 감독 데뷔를 마친 소피아 코폴라는 이들 '인간 감정'을 집중적으로 시추하는 작가군에 속하며, 그녀의 두 번째 작품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복잡다단한 인간감정 중에서도 '고독'과 '낯설음'이라는 감정에 대해 추적하고, 이를 통해 인간 교류의 가장 원초적인 영역을 되살피고 있는 영화이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주인공은 두 사람, CF 촬영을 위해 일본 도쿄를 찾아온 영화 스타 밥 해리스와 남편의 일을 따라 도쿄에서 생활하고 있는 어린 아내 샬롯이다. 이들 두 '미국인'은 이국의 도시에서 철저한 소통의 단절을 느끼며 '고독한' 호텔방과 '낯선' 거리 사이를 배회하는데, 이들이 느끼는 고독과 불안, 소외감의 테마를 두고 소피아 코폴라는 여타 영화들에서 동원하는 고리타분한 방식에 새로운 대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즉, 많은 감독들이 이 같은 감정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차용하는 '손쉬운' 방식인 사일런스 효과의 빈번한 사용과 느리고 침잠된 전개, 우울증 말기의 감정 상태로 배우의 연기패턴을 몰아가는 방식 대신, 그녀는 표피적인 묘사들로 그득찬 다소 가벼운 무드 속에서 다양하고 다채롭지만 얼핏 무의미해 보이는 에피소드들을 연속시키고, 소격효과를 노린 비매칭 컷들을 군데군데 배치시켜 놓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독특한 표현방식은 자칫 처지기 쉬운 이야기 구조에 리듬감을 부여하고, 인물과 상황 속에 녹여내린 유머와 위트를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거둬내고 있는데, 이 방식은 '인물이 이끌어가는 상황'이 아닌, '상황 속에 놓인 인물'이라는 작가의 방향성을 더 명백하게 드러내게 되어 오히려 인물에 대한 관객들의 집중도를 높이고, 관객의 시선을 '플롯'에서 '인물'로 자연스럽게 이동시키는 역할까지도 수행하고 있다. 에피소드들의 순서와 이를 아우르는 틀을 짜낸 소피아 코폴라의 구성편집 형식도 주목할 만하다. 인물들이 각자, 혹은 동시에 벌이는 갖가지 에피소드들을 방임적으로 연결시켜 놓은 이 영화의 구성은, 명확한 제한 시간 - 이 영화의 경우, 주인공 밥 해리스가 도쿄에 머무는 '일주일'이 바로 그 제한이다 - 을 두고 인물들 간의 커뮤니케이션 추이와 상황의 변화를 추적하는 형식을 띠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도 소피아 코폴라는 여타 영화들이 그 '변화과정'을 명백히 구분하기 위해 '첫째날, '둘째날' 이라는 식으로 고집스럽게 플롯을 나누는 형식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편집 형식을 택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며 '일주일'이라는 시간의 길이와 그 구분 방식을 뚜렷이 인식한 관객은 드물 것이다. 정서의 기복과 에피소드의 '중요성' - 물론 감정상태에 근거한 - 에 따라 자유자재로 구사된 이 영화의 시간 개념은, 엄격한 형식에서 벗어났다는 도취감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이면서도, 동시에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개념과 놀랄 만치 맞닿아 있어 '정서의 오딧세이'로서 구분될 수 있는 영화에 새로운 구성적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일주일 동안 느낀 정서적 체험은 이들이 만나기 전 일주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개별적인 시간의 흐름을 유지한 체험이다. 그리고 이런 '시간의 변용성'을 그대로 좇은 소피아 코폴라의 편집 양식은, 실로 대담함과 섬세함이 기적적으로 공존하는 형태로서, '독창성'이라는 형식상의 평가 대신 '진실성'이라는 감정적 평가를 내리게끔 해주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렇듯 신선하고 진솔한 형식 속에서 인물의 내면세계를 펼쳐내 보인 두 배우의 연기 역시 탁월하다. 빌 머레이는 그가 연기해낸, 우울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냉소적이면서 감상적인 면모를 동시에 갖추고 있는 밥 해리스라는 캐릭터에 대해. 가능한한 인물을 복합적으로 해부하면서도 가볍고 단편적으로 표현해내는 형식을 좇아, '인물의 다면성'이라는 명제와 '인물의 사실성'이라는 명제의 접목을 정확히 육화시키고 있으며, 샬롯 역의 스칼렛 조핸슨 또한 캐릭터가 지닌 불안정한 심리와 정서적 욕구불만의 상태를 미묘한 표정변화, 작은 제스츄어들을 통해 극도로 세심하게 연출해내고 있다. 이들 두 배우의 화학작용은 한 영화 내에서 두 명의 배우가 만나 이루어낼 수 있는 효과들 중 가장 밀착적인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이었으며, 근래에 목격한 남녀 캐릭터 간의 호흡구조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다. 물론 영화의 연출과정에 오류나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구성편집은 뛰어나지만 동작편집 중 때때로 동작진행방향을 혼란시키는 오류가 일어나기도 하고, 카메라도 가끔씩 덜컹거리고 불안정하게 움직이며 '인디 영화' 특유의 열악한 향취를 풍기곤 한다. 그러나 이런 명백한 오류들마저도 영화가 설정한 '격리감'과 '불안정성'의 감정 구도를 이끌어내는 데 일조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고, 무엇보다도 모든 예술 형태의 기본적인 전제, 즉 예술이란 완벽한 구성과 한치의 오차도 없는 기술적 완성도로 '100점 만점'의 답안지를 제출해야 하는 기계적 구조물이 아니라 인간의 '정서'를 파고들어 이를 뒤흔들어놓고 결국 제공자와 수용자 사이에 끈끈한 공감대를 형성해내는 정서의 연결고리라는 점에 비추어볼 때, 이 영화가 지닌 자잘한 실수들은 그대로 '실수가 아닌 것'으로 변모해 버리며, 오히려 상승효과를 얻어내기 위한 장치적 역할을 하고 있다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절대로 관객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이루는 영화의 감동적인 클라이맥스가 끝나고, 소피아 코폴라는 다시 한번 도쿄의 거리를 비춰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그리고 관객들은 이 시점에서, 시종일관 낯설고 기이하다는 인상만을 받았던 영화 속 도쿄 거리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정감어린 거리로서 도쿄를 재인식하게 된다. 이런 놀라운 감흥은 이 영화의 '오딧세이'에 동참한 이들이 영화 속 인물들과 철저히 동화되어 얻어낸 '감정적 결실'로서, 그 어떤 기술적 효과로도 얻어낼 수 없는, 나아가 다른 어떤 예술형태도 모방해낼 수 없는 '영화'만의 감흥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런 감흥을 얻기 위해 아직까지도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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