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의 계열사 부채탕감 로비에 연루된 혐의로 박상배(60)씨 등 전 산업은행 간부들이 20일 구속되자 그동안 꾸준히 지적돼 온 국책은행의 난맥상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시중은행과는 달리 우월적인 지위를 누려온 국책은행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최근 전윤철 감사원장이 "역사적 기능과 임무를 마친 공기업의 기능은 중단돼야 한다"며 일침을 놓은데다 정부 일각에서 국책은행 통합론까지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이같은 지적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 정부 보호속 '땅짚고 헤엄치기' 산은과 수출입은행으로 대표되는 국책은행은 정책금융이라는 명목으로 저금리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중은행들로부 부러움과 시기를 동시에 받고 있다. 아울러 금융감독원의 감시,감독을 받는 시중은행들과 달리 국책은행은 국회, 감사원, 재정경제부, 금감원 등의 '관리'를 받고 있지만 실제로는 방치되다시피 한 것이 사실이다. 방만한 조직을 운영하면서 비리가 적발되더라도 낙하산 인사가 '바람막이' 역할을 하면서 웬만해선 끄덕도 하지 않는 맷집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산은은 최근 프라이빗뱅킹(PB),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 민간 영역에까지 발을 넓히면서 시중은행들로부터 '문어발 은행'이라는 비난도 받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국책은행은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에 출발선부터 한두발 앞서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중은행이 길을 닦아놓으면 그런 장점을 이용해 시장을 잠식한다"고 꼬집었다. 또다른 한편에서 국책은행은 매년 국정감사에서 제역할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동시에 받고 있어 이래저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양상이다. 실제로 최근 정부가 중소기업 지원대책을 의욕적으로 내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은 중기대출 비중이 오히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 빈축을 샀다. ◇ "시장보다는 정치 외풍에 신경" 국책은행의 난맥상은 시장보다는 정치적 외풍에 민감하게 움직인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 과거 개발경제 시절은 말할 것도 없이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정권의 눈치보기에 바빴다는 비난을 샀으며, 실제로 산은은 2003년 대북송금 사태로 한차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산은 총재와 수출입은행장은 정부의 몫이라는 공식이 기정사실처럼 여겨지면서 정권에 줄대기가 우선시되고 이에 따라 실력보다는 학연, 지연 등의 인맥을 통해 자리가 바뀌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있다. 이에 따라 직원들도 경쟁을 통한 자기개발보다는 안정적인 직장에 만족하는 분위기가 굳어져 시중은행들 사이에서는 두 국책은행을 두고 '신이 숨겨놓은 직장', '신이 다니고 싶어하는 직장'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수장이 힘있는 '고위층' 출신이고 직원들도 맷집이 좋다보니 감독기관도 국책은행들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자조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산은의 경우 스스로를 한국은행과 같은 격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지금까지 산은에 대한 금감원 조사는 3차례에 불과했고 조사를 나가더라도 우습게 보기 때문에 언짢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 역사적 소임 다했나 전윤철 감사원장은 지난해말 "공공부문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면서 "역사적 기능과 임무를 마친 공기업의 기능은 중단돼야 한다"고 공기업에 일침을 놓은 바 있다. 전 원장이 언급한 '역사적 소임을 다한 공기업'에 대해 감사원측은 함구하고 있지만 개발연대에 설립돼 산업화라는 소명을 다한 공기업에 산은과 수은이 포함됐을 것이라는 추측은 누구나 가능하다. 특히 감사원 안팎에서 산업자금 조달, 수출금융 지원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금융기관의 통폐합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산은은 과거 개발경제 시절은 물론 외환위기 이후 기업구조조정에 앞장섰고 수은은 중소기업 지원의 정책창구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번 현대차그룹의 불법로비 사건에 산은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국책은행의 난맥상을 파헤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편 재경부는 한국금융연구원,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의 관계자들로 산은, 수은, 기업은행 등 3대 국책은행 개편에 관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연내에 결론을 도출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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