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김영란 법 시행 앞두고 권력기관 출신 영입 흐름 더욱 강화

 

▲ 올해 10대 그룹의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 비율이 40%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 가운데 사외이사 방패막이 논란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 ⓒ뉴시스

주요 기업들의 주주총회가 몰려있는 3월, 사외이사의 ‘바람막이’ 논란이 다시 화두로 떠오르면서 급기야는 사외이사 적폐론까지 대두되는 등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12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10대 그룹이 올해 주총에서 선임(신규·재선임)하는 사외이사 119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7명(39.5%)이 장차관, 판검사, 국세청, 공정위 등 권력기관 출신인 것으로 확인됐다. 직업별로는 장·차관 등 정부 고위직이 18명으로 가장 많았고, 판·검사(12명), 공정위(8명), 국세청(7명), 금감원(2명) 등의 순이었다.

특히 올해는 장·차관을 지낸 인사가 12명으로 지난해 6명의 두 배에 달하고 공정거래위원회 출신도 지난해 3명에서 8명으로 늘었다. 원래도 재벌그룹들의 권력기관 출신 사랑은 남달랐지만 올해 유독 심해진 것 같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 10대 그룹 93개 상장사의 사외이사들 중 권력기관 출신의 비율은 36%로 수치상 비교만 해봐도 올해 권력기관 출신의 증가가 두드러진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기업들이 바람막이로써 권력 출신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며 “올해는 세무조사가 약해진 탓인지 국세청 출신이 줄고 대신 전직 장·차관들이 많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올해 10대 그룹에서 유독 거물급 인사가 많이 선임된 것에 대해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 법’, 일명 ‘김영란법’이 통과된 영향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김영란법이 통과되면서 청탁 등의 로비가 제한될 수 있는 만큼 사외이사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며 “기업들 간의 사외이사 선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사외이사 선임에 노력을 더욱 기울였다는 얘기다. ‘김영란법’은 내년 9월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사외이사의 현실은 ‘찬성률 99%’
우리나라에 사외이사 제도가 의무화된 것은 1998년이다. 기업 오너 일가 및 경영진의 부정부패와 전횡을 방지하고자 1998년부터 상장회사에 한하여 사외이사를 의무적으로 두도록 했다.

제도 도입 취지에 비춰볼 때 사외이사는 전문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경영진에 폭넓은 조언과 전문지식을 제공하는 동시에 이사회에 참여해 경영진을 견제하고 감시해야 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반대의 목소리도 내야 한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사외이사들은 견제는커녕 오히려 사측의 방패막이 역할을 해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어떤 기업에서든 사외이사들의 이사회 안건 찬성률이 99~100%대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는 새삼스럽지 않은 실정이다.

최근 지난해 대기업 그룹 사외이사들의 찬성률을 조사한 결과 37개 조사대상 대기업 그룹 중 3분의 2에 달하는 25곳에서는 찬성률이 100%였고 전체 평균이 99.7%였다. 그나마 찬성이 아닌 41표의 3분의 2는 유보·보류·기타였고 반대는 13표에 그쳤다. 가장 낮은 찬성률을 보인 곳은 KT&G였지만 이마저도 찬성률은 95.9%에 달해 순위에 큰 의미가 없엇다.

전체 표가 1만3243표인 점을 감안해 보면 1000번 의결권을 행사해야 겨우 한 번 반대가 나온다는 얘기다. 대기업 사외이사들은 10여 회 안팎의 이사회에 참여하고 연간 수 천만 원을 수령하는 점을 감안해보면 이 같은 찬성률은 직무 유기에 가깝다. 지난해 대기업 그룹 사외이사들의 평균 연봉은 4900만원이었고 한 회당 평균 450만원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김영란법’ 통과를 기점으로 사외이사들의 영향력이 더욱 증대될 것이라는 전망은 씁쓸함을 안겨준다. 기업들이 현재 사외이사 제도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분석인 셈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뭔가 사외이사는 모셔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송원근 경남과학기술대 교수(경제학)는 “사외이사가 대주주의 전횡을 막기는커녕 기업들의 바람막이 역할을 해온 지는 오래됐다”며 “이를 막기 위해 사외이사의 책임을 묻는 집단소송제 도입은 물론 독일처럼 경영 이사회와 감독 이사회를 분리하는 상법 개정까지 다양한 수단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 경영진의 감시와 견제, 전문 지식과 조언의 제공을 맡아야 할 사외이사들이 수 천만 원 대의 연봉을 받으면서도 찬성률은 무려 99.7%에 달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뉴시스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 전체의 40% 육박
올해 주요 그룹별 사외이사 선임을 살펴보면 공교롭게도 현재 그룹의 상황과 맞아 떨어지는 영입이 적지 않아 이러한 사외이사 바람막이 논란으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 전망이다.

삼성그룹은 박봉흠 전 기획예산처 장관, 김정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이 삼성생명에, 노민기 전 노동부 차관이 삼성SDI에, 유재한 전 재정경제부 정책조정국장은 삼성중공업에, 손병조 전 관세청 차장은 삼성화재에 선임되는 등 6명의 고위 공직자 출신을 선임한다. 법조계로는 박종문 전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가 삼성카드에, 변동걸 전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 삼성정밀화학에, 문효남 전 부산고등검찰청장이 삼성화재에 영입됐다.

오는 13일 정기 주주총회를 여는 현대차는 이동규 전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과 이병국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사외이사와 감사로 신규선임하고, 기아차는 이귀남 전 법무부장관을 사외이사로 선임한다. 이귀남 전 장관은 삼성 이건희 회장의 ‘원포인트’ 특별사면을 이끌었던 장관이다.

현대글로비스는 김준규 전 검찰총장을 비롯해 이동훈 전 공정위 사무처장, 석호영 전 서울지방국세청 납세지원국장 등을 사외이사로 선임한다. 특히 당대를 함께한 김준규 전 검찰총장과 이귀남 전 장관이 공교롭게도 현대차그룹의 계열사에서 함께 사외이사로 활동하게 되는 점이 이채롭다.

SK그룹은 하금열 전 대통령실장(SK C&C), 김대기 전 청와대 정책실장(SK이노베이션) 등 청와대 출신과 이재훈 전 산업자원부 차관(SK텔레콤), 권오룡 전 중앙인사위원장(㈜SK)이 사외이사가 될 전망이다. SK이노베이션은 이미 김영주 전 산업자원부 장관을 사외이사로 두고 잇다.

롯데그룹은 이광범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롯데손해보험), 강대형 전 공정위 부위원장과 박차석 전 대전지방국세청장(롯데제과), 김병배 전 공정위 부위원장(롯데하이마트) 등이 권력기관 출신이다.

LG그룹은 홍만표 전 대검찰청 기획조정부장(검사장)을 LG전자 사외이사로 영입해 큰 화제를 모았다. 홍만표 전 검사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수사 당시 대검 수사기획관으로 수사에 참여했고 일일 브리핑을 맡았다. SNS 상에서 일부 이용자들은 이와 관련해 LG전자 불매운동까지 벌이자는 움직임이 포착되기도 했다.

전관예우가 뿌리깊게 박힌 법조계의 관행을 떠올려볼 때 최근 삼성전자와 일명 ‘세탁기 전쟁’을 치르면서 본사가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곤욕을 치룬 LG전자가 홍만표 전 검사장의 영입을 통해 법조계 라인을 강화한 것 아니겠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더군다나 범LG가로 분류되는 레드캡투어도 홍만표 전 검사장을 사외이사로 동시에 선임한다. 레드캡투어 대주주는 과거 주가 조작 사건, 국부 유출 논란에 연루된 데 이어 최근 건물주 갑질 사건과 횡령 혐의 피소 등 끊임없이 물의를 빚고 있는 범LG가문의 구본호 씨다.

◆두산은 권력기관출신 90% 육박
이밖에 ‘빅네임’ 영입이 두드러진 두산그룹은 두산인프라코어의 사외이사 후보로 한승수 전 국무총리와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박병원 전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현 경총 회장), 김대기 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등 고위 공직자 출신 4명을 올렸다. 모두 이명박 정부의 핵심 관료들이다. 두산중공업은 김동수 전 공정거래위원장을 사외이사로 영입했다

한화그룹은 문성우 전 법무부 차관(한화생명)과 김성호 전 보건복지부 장관(한화손해보험)을, GS그룹은 전형수 전 서울지방국세청장(GS글로벌)을 사외이사 후보로 택했다. 또 현대중공업은 송기영 전 서울민사지법 판사를, 한진그룹은 이주석 전 서울지방국세청장(대한항공)과 한강현 전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한진)를 사외이사 후보로 올렸다.

포스코는 박병원 경총 회장과 김주현 통일준비위원회 경제분과위원장을 영입한다. 시민단체들은 포스코의 사외이사 선임에 대해 낙하산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비중으로는 두산그룹이 사외이사 후보 가운데 권력기관 출신이 88.9%(9명 중 8명)로 가장 많았고,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한진그룹은 50.0%였다. 또 GS(40.0%), 삼성(39.3%), SK(35.0%), 한화(33.3%), 롯데(30.8%), 엘지(7.7%) 등의 순이었다.

홍성준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처장은 “기업들의 사외이사 선임에서 주의 깊게 봐야할 점은 공정위 출신을 데려왔을 때 그 기업이 공정위 관련 제재가 걸려 있는 지, 검찰 출신을 데려왔을 때 기업 관련 사건이 있는지 등”이라면서 “관련이 있는 경우 영입된 사외이사들은 로비스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고 말했다.

▲ 큰 손 국민연금이 현대차의 사외이사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밝히거나 일부 의안 분석 업체가 사내이사 선임 건에 반대를 권고하는 등 대기업들의 사외이사 선임 관행에 제동을 거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사진 / 홍금표 기자

◆일부 반대 움직임 있지만...‘올해도 암울’
한편 이 같은 기업들의 사외이사 선임 관행에 제동을 거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지난 11일 ‘큰 손’ 국민연금 산하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는 현대자동차 등 정기 주주총회 안건에 대한 의결권 행사 방향을 심의·의결하면서 기아자동차와 현대모비스의 사외이사 2인에 대한 재선임 안건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9월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 컨소시엄이 한전 부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경영진에 대한 감시·감독 기능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다. 국민연금은 현대모비스 지분 8.02%와 기아차 7.04%를 보유하고 있어 오너 일가보다 지분율이 높다.

국민연금은 이들 사외이사에 대해 “기업의 이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해 논의 없이 대표이사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등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반대 배경을 설명했다. 국민연금은 다만 경영의 안정을 고려해 사내이사 재선임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기로 했다.

주주총회 안건 전문 분석 업체인 서스틴베스트는 LG전자의 홍만표 전 대검찰청 기획조정부장의 사외이사 선임건과 포스코의 박병원 경총 회장의 사외이사 선임건에 관해 “직무에 충실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며 반대를 권고하고 나섰다. 이 업체는 국민연금의 의뢰에 따른 CJ대한통운 사외이사 선임에서도 최찬묵 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부장검사의 선임에 대해 CJ 이재현 회장과 대학 동기라는 이유로 독립성이 결격됐다며 반대를 권고했다.

하지만 올해도 이러한 움직임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영향력이 큰 기관투자가는 여전히 주총 거수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안건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잘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주총에서 의결권 행사 내역을 공시한 82개 민관 기관투자가의 반대율은 1.4%에 그쳤다.

주총 시즌과 더불어 첫 ‘슈퍼 주총데이’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도 국민연금과 몇 몇 연구소 외에는 주총 안건에 대한 적극적인 입장 개진이나 평가가 두드러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사외이사가 ‘거수기’나 ‘바람막이’를 넘어 기업의 투명성을 가로막는 ‘적폐’라는 비판까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외이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주주들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와 사외이사의 자격 요건 및 선정 과정의 투명성 확보가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 시사포커스 / 김종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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