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김영옥 평화센터 이영만 이사장

▲ “나는 재미 언론인 한우성 기자가 쓴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간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 시사포커스/홍금표 기자

한때 철옹성 같던 지지율도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마른 진흙처럼 부서지게 마련이다.

한국 사회는 기성 세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반목과 대립이 극심한 상황이다. 국토도 세계사의 격류에 부닥쳐 반토막이 나버려 남북 모순이 심한 판국에 정파, 지역, 소득의 양극화 현상으로 발생한 남남 갈등 또한 방관만 하고 있기에는 너무 위험한 사회병리적인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한국이 미래에 중국과 일본, 러시아 미국 등과 대등한 수준의 강소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이 중층복합적인 모순과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는 리더십의 개발이 절체절명의 과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5년에 작고한 고 김영옥 대령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2차 세계 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운 영웅으로 알려져 있으나, 김영옥 평화센터 이영만 이사장은 전쟁 영웅에게서 이 시대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새 시대를 열어 나갈 글로벌 리더십을 발견했다. 28일 오전 한국경제신문사 5층 국방기술품질원 사무실에서 이 이사장을 만나 김영옥 대령의 삶의 흥미로운 에피소드와 함께 미래를 이끌고 나갈 리더십에 대해 듣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이영만 이사장과의 일문일답.

Q. 공군 중장에서 전역 이후 어떻게 김영옥 평화센터 이사장을 맡게 됐나?
A. 5년 전 공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으로 있을 때 미국 LA에서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는 한우성 씨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우리나라 육군 창설은 1948년이고 공군 창설은 ‘49년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

▲ 김영옥 평화센터 이영만 이사장은 “이제 한국 젊은이들도 시야를 넓혀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지도력을 발휘하는 ‘글로벌 리더십’에 눈 떠야 한다”고 강조했다. ⓒ 시사포커스/홍금표 기자

한국 공군은 1919년에 미국 캘리포니아 비행훈련을 하던 한국인들이 창설했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을 갖고 얘기하는 거였다. 강의를 마치고 함께 점심을 먹는데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이란 책을 하나 권해서 읽어 보고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사람을 만난 것 같은 감동을 느꼈다. 군 생활을 40년 해오면서 어떻게 이런 사람을 모르고 있었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2014년 4월 말 전역을 결심했을 때 다시 한 기자를 만났다. 동갑내기라 친구하자 하고 전역 이후 나의 제2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 나갈지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제2의 인생을 고민하고 있던 차에 김영옥 대령(이하 김영옥)이란 ‘롤 모델’을 법적 기반을 갖고 대한민국에 적극 알리는 사업을 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그해 5월 초 서울에 상경했다. 처음에 망설여졌다.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김영옥 대령이 보여준 덕목을 알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고 ‘나도 이 분처럼 살아야겠다’ 싶어 용기를 냈다.

Q. 한우성 기자는 어떻게 해서 그 책을 쓰게 됐나?
A. 1997년 2월 한우성 기자와 김영옥이 처음 만났다. 당시 그 분은 그동안 언론의 많은 인터뷰 제안에 대해 “나는 내가 책으로 기록될 만한 인생을 살지 않았다”며 거부해 오던 차였다. 한 기자는 이에 대해 “선생님을 내세우기 위한 책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의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자 하는 취지다”라고 말해 겨우 설득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집필하는 데만 7년이 걸렸다.

Q. 전쟁 영웅 김영옥에게서 겸손함을 발견했다고 들었다.
A. 김영옥 대령의 집에는 남 보라고 내놓은 훈장이 없었다고 한다. 한 번은 “훈장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먼지가 켜켜이 쌓인 박스 안에 쌓여 있는 수백개의 훈장을 보여줬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는 집에 훈장을 전시할 생각을 했으니까. 김영옥 대령은 전역 이후 “내가 만약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살겠다”며 정·관계의 많은 유혹을 뿌리쳤다는 점도 군인으로서 남다르게 다가왔다.

1951년 김영옥은 미국에서 세탁사업을 하다 한국 전쟁에 미군으로 참전했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한국 고아 500명을 경천애인사에 있는 고아원에서 돌봤다. 지금은 그곳이 없어져 아쉬움이 남는다. 그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유색 인종 차별이 심하던 때에 미군 병사들을 지휘하며 당시 동부전선을 강단 있게 밀어붙여 지금의 휴전선 지형을 만들어 냈다.

Q. 김영옥을 통해 알리고 싶은 바가 있다면?
A. 우리 젊은 세대는 그를 알아야 한다. 한국 사회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제대로 실천하는 롤 모델 중 하나가 김영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김영옥이 우리가 표상이나 지표로서 따라야 할 유일무이한 리더십의 소유자나 존재란 말이 아니다. 그는 미국인이면서 한국 사회를 잊지 않았다. 집에는 항상 대한민국 지도가 걸려 있었다.

김영옥은 “나는 100% 미국인이요, 또 100%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이겠는가? 이제 한국 젊은이들도 국제적 지역 장벽을 넘어서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천했던 김영옥의 국적을 초월해 살았던 삶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 1943년 7월에 촬영된 김영옥 소위와 부인 아이다 서의 신혼 사진. 다음달 김영옥은 나치독일과 싸우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났다. 간호사였던 부인은 남편이 이탈리아에서 부상당했다는 전보를 받자 남편을 만나기 위해 미 육군 간호장교가 됐다. 김영옥 부부는 2차 대전 때 연합군 장교로 싸운 유일한 한국인 부부였다. 제공=김영옥 평화센터

Q. 김영옥은 2차 대전에 어떻게 참전하게 됐나?
A. 2차 대전 당시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이후 미국은 일본계 미국인을 다 불러 충성도를 실험했다. 당시 김영옥은 이들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으로 복무해 수많은 전선에서 맹활약 했다. 김영옥은 일제강점기에 미국에 이민 왔으므로 문서에는 일본인으로 기재돼 있었다.

처음에는 일본인들과 갈등이 있었다. 프랑스-독일 접경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며 승패가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적진에 들어가서 독일인 포로를 잡아 와서 일본인 부하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있었다. 참으로 인상 깊은 장면은 김영옥이 생포한 독일인으로부터 정보를 얻은 이후 인간에 대한 연민 때문에 독일군을 풀어줬다는 것이다.

또한 김영옥은 1960년대 한국이 재건의 길에 들어섰을 때, 미국의 군사고문단 일원으로 고국에 돌아와 ‘한국방어계획’ 초안을 잡는 데 이바지했고, 미사일 부대를 창설했다.

Q. 김영옥 평화센터 이사장으로서 어떤 사업을 준비하고 있나?
A. 그 분의 일생을 재조명하는 뮤지컬·연극·드라마 대본화를 기획하고 있다. 김영옥은 이미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2월에는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독후감 공모전’을 열고, 좋은 글을 쓴 사람을 뽑아 유럽의 전적지 관람도 시켜줄 생각이다.

현재 사단법인 김영옥 평화센터는 걸음마 단계다. 올해는 관공서·기업·학교를 다니며 김영옥의 사상과 실천을 적극 널리 알릴 생각이다. 이제까지는 한우성 기자가 한국에서 강연을 주로 도맡아 왔는데 앞으로는 나도 나설 생각이다.

은평평화공원 내 김영옥 기념관 건립을 계획 중이다. 1층은 기념 시설을 들여놓고 2층은 강당, 3-4층은 교육 문화 시설, 5층은 평화센터로 꾸미겠다.

▲ “관심병사를 1대1로 만나 대화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 지금 군대는 그런 지휘관이 많아지고 있다. 고무적인 현상이다. 복종은 규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존경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휘관의 자질이 필요하다. 자신을 낮춰 남을 위해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 시사포커스/홍금표 기자

Q. 군대 내 관심병사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김영옥 리더십을 연구하고 알리는 입장에서 의견을 듣고 싶다.
A. 2007~2008년도 별 하나를 달고 강릉 공군 제18 전투비행단장으로 복무하면서 모든 신병을 만나 소통했다. 그때 만난 사병들은 군 생활에 관해 대다수가 소모적 시기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 보니 사병들은 받는 것에 익숙하고 시키는 것 밖에 하지 않았다. 한편 이들에게서 창의적 부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때 나는 젊은이들의 생각을 인정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30~40년 후에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사람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관심병사 문제를 들여다보자. 지휘관은 관심병사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병사의 입장에서 친밀하고 인간적으로 교류해야 한다. 병사들의 개인 신상과 관련해서 1대1로 사병들 지도가 들어가야 이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군대가 하나가 된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버지 존재에 대한 인식이 적다. 자녀를 두지 않는 가정도 많고, 외아들도 많다. 부모는 맞벌이하느라고 자녀에게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기 힘들다. 가족 간 유대가 희미해, 정신적으로 유약한 측면도 있음을 부인 못한다.

이때 김영옥 리더십이 중요하다. 복종은 규율에서 나오지 않는다. 김영옥은 일본 부대를 어떻게 지휘했겠나? 군대는 상명하복의 기강이 바로 서야 한다. 단 병사들의 존경을 이끌어내고 합목적적이고 정의로운 명령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 미래의 전장에서 사병들이 명령에 따르도록 하려면 나를 낮추고 남을 위해 용기를 내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 김영옥 평화센터 이영만 이사장은 “우리가 마음의 두려움이란 장애를 극복할 때 한국은 도약할 수 있다”며 희망을 만들어내자고 역설했다. ⓒ 시사포커스/홍금표 기자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전역 이후 가족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대학교수나 기업에 가지 않고 보수도 없이 김영옥 평화센터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반대가 있었으나 나중에 이해해 줘서 고맙다.

대한민국 사회는 현재 지역·이념·신분 등의 대립으로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를 어떻게 치유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우리들의 책임이다. 사회가 분열과 모순, 반목으로 얼룩져 있어 앞으로 5~10년은 홍역을 치를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에 장애가 생기기 쉽다. 장애란 자기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이다. 우리가 두려움을 갖지 않을 때 우리 나라도 한 단계 성숙해질 것이다. 나도 가끔 내가 이사장으로 이 평화센터 사업을 잘 꾸려나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든다. 그럴 때 나는 김영옥의 삶이 보여줬던 겸손·헌신·용기를 떠올린다. 요즘은 대중 교통 수단을 이용하고 있다. 한국 사회를 다시 배우고 있다. 이 한 몸 던지기로 했으니 마음이 편하다.

 

고 김영옥 대령 주요 수상 내력

2004년 미국 이민 100주년 이민영웅
2005년 한국 태극무공훈장
2005년 프랑스 레종 도뇌르 무공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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