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성 제고위해 임용했더니 ‘바람막이’로 전락?

▲ 유통업계의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신세계와 롯데의 4대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 임용 비율이 비교적 높게 나타나 이목이 집중됐다. 사진 / 홍금표 기자
 최근 ‘땅콩회항’문제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대한항공과 관련해 사외이사의 역할이 재조명됐다. 오너로써 함량 미달인 재벌 3세들의 세습경영을 사외이사가 견제했다면 이 같은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외이사제란 경영감시를 통해 대주주의 독단을 견제하고, 이로써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를 겪을 당시인 1998년 IMF의 권고로 사외이사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사외이사제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각에서는 일부 기업의 사외이사를 두고 그저 ‘왕조경영’에 한 표 선사하는 거수기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사외이사의 경우 대주주의 영향을 받지 않는 대학교수나 변호사, 공인회계사 등 외부전문가 중에서 선임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실제 대선에 기여했거나 혹은 그야말로 ‘보험용’으로 뽑은 퇴직관료가 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서 사명감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뿐더러 전문성조차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사외이사 임용에 “4대 권력기관 출신 선호”
사외이사와 관련한 ‘책임론’이 불거질 때마다 거론되는 곳이 유통업계의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신세계와 롯데다. 실제 신세계의 경우 국내 기업들 가운데 관료 출신 사외이사 비율이 가장 높은 수준인 100%로 알려져 이목을 끌었다.

지난 19일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가 49개 기업집단 계열사들의 사외이사 출신 현황에 대해 조사한 바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신세계는 사외이사 네 자리에 국세청, 검찰청, 감사원, 공정거래위원회 등 4대 권력기관 출신들을 각각 임용했다.

실제로 현재 신세계의 사외이사진은 국세청장 출신인 손영래 이사, 법무연수원장이었던 조근호 이사, 감사원장 직무대행이었던 김종신 이사, 공정위 부위원장이었던 손인옥 이사로 구성돼 있다. ‘국세청-검찰청-감사원-공정거래위원회’ 구도는 지난 6년 간 단 한 번도 바뀌지 않고 철옹성 같은 규칙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2011년 신세계에서 분사한 이마트의 경우 사외이사 임용 시 ‘국세청-검찰청-감사원-보건복지부’의 구도를 고수했다. 사외이사진이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인 전형수 이사, 전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인 박영렬 이사, 전 감사원 감사위원인 박종구 이사, 전 보건복지부 차관인 문창진 이사가 이마트 사외이사진(4명)으로 구성된 것에서 이 같은 사실이 확인 가능하다.

이들 사외이사들이 재직했던 정부 기관은 실제 해당 기업의 활동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성이 있는 곳이다. 이에 이들이 갖춘 전문성 여부를 막론하고 신세계의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 고집’은 얼마든지 오해를 살 수 있는 부분이다.

이에 맞서는 롯데의 ‘권력기관 출신자 선호’도 만만치 않다. 롯데의 경우 2014년도 기준 8개 상장 계열사에 총 29명의 사외이사를 두고 있는데 이 중 69%에 해당하는 20명이 고위 관료 출신으로 알려졌다. 4대 권력기관 출신도 13명으로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 13명 가운데 77%인 10명이 관료출신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정동기 전 대검찰청 차장이나 박동열 전 대전지방국세청장, 정병춘 전 국세청 차장 등이 시선을 끌었다. 일각에서는 국세청과 공정위 등에 잇따라 조사를 받으며 사정당국의 압박을 받아온 롯데그룹이 ‘방패막이’용 사외이사 영입을 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 KB사태를 통해 사외이사 문제가 또 다시 공론화됐다. KB금융 사외이사진은 올해 3월 정기주주총회 때 전원 물러나기로 결정했다.ⓒ뉴시스


◆KB사태로 불거진 사외이사 문제
전문성 결여와 방패막이논란 등으로 점철된 사외이사 문제는 지난해 금융권 최대 스캔들이었던 ‘KB사태’를 계기로 다시 한 번 거론됐다.

KB사태는 지난해 5월 이건호 전 국민은행장이 전자 시스템교체 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다며 금감원에 특별검사를 요청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은행 내부 문제로 외부 감사를 자청한 것이다.

이에 앞서 당년 4월 전산 시스템을 기존 IBM에서 유닉스로 교체하는 안건이 사외이사 6명의 주도로 국민은행 이사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당시 정병기 국민은행 감사는 “경쟁 입찰이 없었고 교체 과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이건호 전 행장이 이 의견을 수용해 내부 감사에 들어갔다.

정 감사는 시스템 변경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감사위원회에 제출했지만 사외이사들은 채택을 거부했다. 이에 이 전 행장이 같은 내용의 의견서를 반복해서 상정했지만 재차 거부당하자 금감원에 특별검사를 요청한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 사태에 대해 임영록 전 회장과 이건호 전 행장의 주도권 다툼으로 해석했다.

조사에 착수한 금감원은 6월 임 전 회장과 이 전 행장에 대해 ‘문책경고’ 조치를 사전 통보했다. 문책경고는 현 직위의 연임이 불가능하고 임기를 마친 뒤 3~5년간 금융계 재취업이 불가능한 것으로 사실상 금융계 퇴출을 의미하는 중징계에 해당한다. 그러나 8월 공식논의 기구인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에서 임영록 전 회장과 이건호 전 행장에게 내린 징계는 이보다 한 단계 낮은 ‘주의적 경고’였다. 6번의 제재심의위원회 끝에 수위가 내려간 것이다.

그러다가 9월4일 최수현 전 금감원장이 “범죄 행위에 준하는 심각한 내부통제상 문제가 표출됐다”며 경징계 조치를 다시 뒤집고 중징계 결정을 번복해 파장이 일었다. 이건호 전 행장은 바로 사의를 표명했지만 임영록 전 회장은 반발했다. 은행장에 대한 징계는 금감원 결정으로 확정되지만 금융지주사 회장에 대한 징계권은 금융위원회에 있다.

금감원은 임 전 회장에 대한 중징계를 금융위에 건의하기로 했다. 금융위원회는 9월13일 금감원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직무정지’ 결정을 내렸는데 이는 사실상 사임 권고였다.

하지만 임영록 전 회장이 또 다시 반발하면서 KB사태는 임영록 전 회장과 금융 당국의 갈등이라는 새 국면을 맞았다. 금융감독원은 9월15일 임 전 회장 등 시스템 전환사업 관련자 4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KB사태를 조기 수습하지 못한 최수현 전 금감원장은 11월18일 사표를 내고 물러났다. 이것이 KB사태의 전말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9일 KB사태의 핵심 인물이었던 정병기 KB국민은행 감사가 자진 사퇴했다. 정 감사의 사의 결정으로 과거 KB사태에 관련됐던 사외이사와 임원들이 잇따라 모두 사퇴했다. KB 사태 당시 임영록 전 회장 편에 섰던 윤웅원 KB금융지주 부사장과 박지우 국민은행 부행장은 지난 연말 인사를 통해 퇴임했고, KB금융 사외이사진도 올해 3월 정기주주총회 때 전원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한편, 모두가 ‘임영록 전 회장-이건호 전 행장’의 권력다툼에 집중하고 있을 때 경제개혁연대는 KB사태의 한 축인 KB 사외이사들에 사퇴 압력을 가했다. 경제개혁 연대는 “임영록 전 회장과 이건호 전 행장 사이의 갈등 과정에서 이사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는지 의문이다. 사외이사 전원 사퇴를 요구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KB금융 사태는 임영록 전 회장만의 책임이 아닌 지주사 임직원의 감독과 자회사의 경영관리 의무를 가진 이사회 전체의 공동책임”이라며 “새 회장 선출을 계기로 KB금융 전체의 개혁을 추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사회의 인적 교체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경제개혁연대 김상조 소장은 “기본적으로 KB금융지주 이사회가 주전산기 교체를 둘러싼 내분사태 당시 그룹의 컨트롤 타워(control tower)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판단한다”며 “따라서 KB금융 사외이사들은, 관련 법령 위반에 따른 금융감독당국의 제재 여부와는 별개의 차원에서, 주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 및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책임을 스스로 인정함과 동시에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내놓으면서 시장과 국민의 엄중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에 업계는 KB가 향후 사외이사를 어떤 식으로 재편할지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KB사태의 폐단을 번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편가르기용 혹은 바람막이용 임용이 아니라 전문성을 갖춘 인사 중심으로 뽑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KB금융은 오는 3월 초 열리는 정기주주총회에서 사외이사 전원을 새로 선임할 예정이다.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 겸 국민은행장은 금융위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KB금융 사외이사를 뽑아야 하는데, 금융위는 사외이사를 금융, 경영, 회계 등 다양한 금융분야의 지식과 현장경험을 모두 보유해야 한다고 규정한 바 있다.

금융위는 KB금융의 사외이사 선임을 본보기로 다른 금융회사의 지배구조도 개선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KB금융을 비롯해 신한금융, 하나금융, NH금융과 6개 은행의 사외이사 63명 가운데 43명이 오는 3월에 임기가 끝나기 때문이다.

▲ 삼성물산의 경우 경제·건축·언론 등 다방면에서 사외이사를 골고루 뽑고 있다.ⓒ삼성물산

◆몇몇 기업들 전문성 강조하기도
일부 금융회사들이 사외이사 자리의 적임자로 권력기관 출신자들을 선호하는 추세에 대해 금융위가 구조개선에 적극적으로 임하겠다며 척결의지를 밝혔다. 이러한 와중에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사외이사를 등용해 전문성을 강조하고 있는 기업들이 있어 시선을 끌었다.

삼성물산의 경우 경제·건축·언론 등 다방면에서 사외이사를 골고루 뽑고 있다. 업계에서는 삼성물산이 법조인과 관료출신 중심으로 사외이사를 선출하지 않는 것과 관련해 워낙 삼성의 법무팀이 잘 마련돼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대기업들이 법조인과 관료출신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가장 큰 이유가 검찰 및 법원, 정부에 대한 직·간접적인 영향력 행사가 가능하기 때문인데 삼성물산은 현재 이러한 ‘병풍’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삼성물산 사외이사는 이종욱 서울여대 경제학과 교수, 이현수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정규재 언론인(한경), 윤창현 금융연구원장 등 4명이다.

이종욱 교수는 한국국제금융학회 회장, 한국중소기업학회장, 금융위원회의 금융발전 심의회 중소서민금융위원장을 연임하면서 금융계에서의 입지가 두텁다. 이현수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는 아시아권 최초로 미국토목학회(ASCE)로부터 지난해 최우수논문상을 받는 등 건축업계 전문가로 통한다.

정규재 한국경제 논설위원은 현재 ‘정규재TV’를 방송 중이며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를 두루 섭렵한 언론인이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지난 2012년 3월부터 한국금융연구원 원장직을 맡고 있다.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캠프 정책자문단에도 참여한 바 있다.

업계에서는 이들의 임용이 검찰 및 법원 등에 ‘입김’으로 작용할 수는 없지만, 삼성물산이 필요로 하는 금융·건설 등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높일 수 있는 결정이라는데 입을 모았다.

메리츠종금증권의 경우도 사외이사 중 관료 출신을 한 명도 뽑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학계와 재계, 은행 등 각 분야 금융전문가들이 사외이사로 포진해 있다.

사외이사로 선출된 강장구 씨는 서울시립대 교수 및 뉴욕 로체스터대학 방문교수를 거쳐 현재 KAIST 금융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용호 씨는 삼성그룹의 금융팀 및 쌍용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친 금융‧경제 전문가로 한화그룹 구조조정 본부 전무 및 대한생명보험 총괄 전무, 한화증권 대표이사 등 보험과 증권 분야를 두루 거친 인물이다. 한대우 씨는 한국산업은행 자본시장본부장 출신으로 법무법인 태평양의 고문을 역임했다.

한편, 관료출신 사외이사 비율을 점차 줄이고 있는 기업도 있었다. LIG손해보험의 경우 종전 사외이사 6명 중 관료 출신이 1년 사이 3명에서 2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시사포커스 / 진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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