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사면 촉구에 싸늘한 여론…설 특사로 시선 쏠려

 

▲ 지난 5일 전경련 회장인 허창수 GS그룹 회장이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에 이어 기업인 가석방을 촉구하고 나섰다. 새해 들어 재계 인사들이 신년사 등을 통해 잇따라 기업인 가석방을 촉구하고 나섬에 따라 새해 벽두부터 다시 관련 논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전경련

새해 벽두부터 재계가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지난 연말 정치권에서 불거진 ‘경제인 사면’ 문제가 재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어서다. 새해 들어서도 재계 총수들이 신년사 등을 통해 잇따라 기업인 가석방을 건의하고 있는 가운데, 시민단체와 야당의원들에 국민들도 반감을 드러내는 등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엇갈리고 있다.

새해 첫 날 가장 먼저 14만 상공인을 아우르는 경제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회장인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횡령 사건으로 수감 중인 최태원 SK 회장에 대해서만큼은 얘기해야겠다며 입을 열었다. 이날 박 회장은 새해 인터뷰에서 “다른 건 몰라도 최 회장 경우는 좀 얘기했으면 좋겠다”며 “충분히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제 SK가 변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간 정치권 일각에서 경제 활성화를 위한 기업인 가석방·사면 얘기가 흘러나오고는 있지만 경제단체장이 직접 이를 언급한 것은 박 회장이 처음이다. 그는 “(최 회장이) SK그룹의 수장이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 처벌을 충분히 받았다는 판단을 좀 해줘야 한다”고 강조하며 “한 번도 (대기업 총수 사면·석방 건의를) 해오지 않았는데 이 경우는 좀 생각을 달리해도 괜찮을 것 같다. 유독 기업인이라고 해서 끝까지 안 된다고 하는 건 좀 아니다”고 덧붙였다.

지난 5일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인 허창수 GS그룹 회장이 바통을 이어 받았다. 허 회장은 5일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에서 열린 ‘2015년 경제계 신년인사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기업인을 사면하는 것이 더 좋다”라고 말했다.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기업인 사면에 대한 찬성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이날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도 “다른 건 잘 몰라도 올해는 정말 기업인의 기를 살려줘야 한다”며 거들었고 문규영 아주그룹 회장도 “”최태원 회장이 형기를 반이나 채웠다면 한 번 더 기회를 줬으면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같은날 한덕수 한국무엽협회 회장 역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업인 사면 및 가석방 논의를 지지하고 나섰다. 한 회장은 “기업인이라고 해서 차별을 받으면 안된다는데 전적으로 공감한다”며 “(기업인들이) 경제활동을 활발하게 만드는데 중요한 결정자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런 현실을 분명히 이해하고,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재계, 잇단 기업인 사면 촉구
기업인들에 대한 사면 논의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정부 인사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꾸준히 제기돼 왔다. 지난해 9월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경제살리기에 도움이 되는 케이스라면 (기업인들의 사면·가석방을) 차단할 필요는 없지 않나. 지금은 그런 검토를 심도 있게 할 필요가 있다”며 기업인 사면설에 불을 질렀다.

여기에 즉각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화답하며 힘을 실어줬다. 최 부총리는 같은달 2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경제살리기에 도움이 된다면 기업인 사면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면서 “기업인이라고 지나치게 원칙에 어긋나서 엄하게 법 집행을 하는 것은 경제살리기 관점에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잇단 정부 인사들의 사면·가석방 촉구에 성탄절 특사·가석방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냐는 재계의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올랐지만, 지난달 터진 ‘땅콩 회항’ 사건과 ‘정윤회 문건’ 파문으로 관련 논의가 쏙 들어갔다. 특히 현재는 구속 수감돼 있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파문은 전국민들에게 재벌 오너가에 대한 반감을 불러 일으키며 반기업 정서로까지 급속하게 확산돼 얘기를 꺼낼 수 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 부총리는 성탄절을 앞둔 지난달 22일에도 “기업인 사면에 대한 입장에 변화가 있느냐”는 질문에 “기업인이라서 혜택을 받아서도 안되지만 역차별도 안된다”면서 “일반인은 (요건을 갖추면) 가석방이 되는데 기업인이라고 해서 요건을 갖췄는데 안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지만 반기업 정서가 극에 달하고 있던 시기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결국 614명의 수형자가 가석방됐던 성탄절 특사에서는 기업 총수가 빠졌다.

▲ 현재 700일 넘게 수감돼 재벌 총수 중 최장 복역 기록을 세우고 있는 SK그룹 최태원 회장에 대한 가석방 촉구가 특히 뜨거운 감자다. 하지만 SK그룹 관계자는 이에 대해 딱히 기대하고 있는 분위기는 없다고 손사레를 치고 있다. ⓒSK

◆가석방·사면 대상, 누구누구 있나
이처럼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기업인 사면·가석방 논의가 새해들어 재개되고 있는 것은 다음 달로 예정된 설 특사와 3.1절 특사를 노리는 포석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구속 수감 중인 기업인 가운데 가석방 대상자로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최재원 SK그룹 부회장, 구본상 전 LIG넥스원 부회장 등이 거론된다.

현재 재계 인사들이 입을 모아 가석방을 촉구하고 있는 대상은 SK그룹 최태원 회장이다. 현행법상 가석방 대상은 무기징역 선고시 20년 이상, 유기징역은 형기의 3분의 1 이상을 복역해야 한다. 이같은 기준에 비춰볼 때 가석방이 현실화 될 경우 ‘1순위’로는 최태원 회장이 유력하다.

지난해 1월 최 회장은 계열사 자금 465억원에 대한 횡령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현재까지 복역 중이다. 지난해 12월 31일 기준으로 700일을 복역, 전체 형기의 3분의 1(486일)을 훨씬 초과해 가석방 요건을 충족한 상태다. 오는 30일이면 형기의 절반까지 채우게 된다.

특히 최 회장은 역대 재벌 총수 가운데 최장 기간 수감 중이라는 점에서 재계 인사들이 한 목소리로 가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이밖에도 최 회장은 병보석 신청이 없었고 사회적 기업 전문서를 펴내는 등 모범적인 수감생활을 해왔다는 평을 듣고 있어 이같은 가석방 촉구 주장이 탄력을 받고 있다.

여기에 동생인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도 이미 형기의 3분의 1 이상을 채웠다. 최 부회장은 지난 2011년 12월 검찰에 구속된 후 다음해 6월 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이듬해 9월 2심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바 있다.

구본상 전 LIG넥스원 부회장도 가석방 요건을 채운 상태다. 구 부회장은 2012년 기업어음 사기 발행 혐의로 구속돼 징역 4년을 확정 받고 2년 이상의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 당시 함께 재판을 받은 구본엽 전 LIG건설 부사장은 징역 3년이 확정된 후 315일 동안 수감돼 오는 2월 20일경 가석방 요건이 충족된다. 하지만 구본엽 부사장은 설 당일이 2월 19일이기 때문에 하루 차이로 설 연휴 특사에는 포함되지 않아 3.1절 특사를 노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가석방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총수들의 해당 기업들은 얘기만 꺼내도 손사레를 치며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SK그룹 관계자는 “오너 가석방과 관련해 기대를 거는 등 특별한 분위기는 아직 없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 2012년 7월 구속돼 항소심에서 3년형을 선고받은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구속집행정지를 반복해 수감기간을 114일 채우는 데 그쳤고, 현재 대법원의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 가석방이나 사면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질병을 이유로 보석을 받은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과 형집행정지를 받은 이 전 회장의 모친인 이선애 전 태광그룹 상무 역시 가석방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상태고, 불구속 기소된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과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고등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 재판을 받고 있는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역시 가석방 대상이 아니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은 집행유예로 풀려난 만큼 가석방이 아닌 사면의 대상이다. 현재 김 회장은 사회봉사명령을 완수하고 지난해 11월부터 본사로 출근하고 있지만 집행유예 기간중이기 때문에 대표이사직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집행유예 판결이 확정된 사람이 임원을 하면 화약류 제조업 허가가 취소되며, 사업허가를 다시 받기 위해서는 집행유예 기간을 모두 마친 후 최소 1년이 지나야 한다는 총포·도검·화약류 단속법 규정 때문이다. 김 회장은 지난해 2월 징역3년에 집행유예 5년 등을 선고받은 상태라 사면된다면 대표이사직에 복귀할 수 있다.

◆시민단체·국민들, ‘꿈도 꾸지 말라’
지난해 하반기부터 새해 벽두까지 정계와 재계에서 잇따라 SK 최태원 회장 등의 가석방을 촉구하고 있지만 시민단체 및 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촉구가 이어질수록 과연 정부와 청와대가 가석방 카드를 꺼낼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한 분위기로 흘러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특히 당장 관련 논의가 나올 때마다 시민단체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경실련은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기업인 총수 사면 필요성을 언급하자마자 검찰에 형법상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했다. 경실련은 두 장관의 발언이 대통령 대선 공약 사항을 무력화시키려는 직권 남용 행위에 해당하고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 직무를 유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투기자본감시센터 역시 지난달 30일 조기 가석방에 대한 절대불가 의견서를 황교안 법무부 장관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특히 투기자본감시센터는 정부와 재계가 내세우고 있는 ‘경제살리기’라는 취지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SK그룹의 시가총액이 2012년 연말부터 지난해 12월 15일까지 12.7%나 증가했다는 점이 주장의 근거다. 업계에 따르면 재벌그룹의 경우 전문경영인 체제를 잘 갖추고 있어 총수 부재가 주가에 미치는 영향이 예전처럼 크지 않다는 평가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참여연대 역시 가석방을 반대하고 나섰다. 참여연대는 지난달 29일 이와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기자회견을 통해 “일반인이 대부분 형의 80% 이상을 지낸 뒤 가석방 되는 데 형의 3분의 1이 지났다는 이유로 가석방을 거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경실련 역시 이같은 주장에 동조하며 “현행 형법 72조에 의해 가석방은 형기의 3분의 1이 경과된 경우에 법무부 장관에 의해 가능토록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3분의 2 이상을 채울 경우 한해 부대조건을 붙여 제한적으로 가석방을 시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실련은 “최태원 회장 형제와 구 부회장은 형기의 3분의 2는 커녕 반도 채우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최 부총리가 주장하는 일반인과의 가석방의 법적 형평성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며 “경제 살리기라는 미명 하에 진행되는 재벌 총수들의 대한 특혜적 주장일 뿐이다”고 성토했다.

여론도 좋지 않다. 지난달 30일 KBS가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가석방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66.3%로 나타나 찬성 의사를 표시한 29.1%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앞서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반대 의견이 58.1%로 나타나 22.0%로 나타난 찬성 의견을 압도했다.

▲ 박근혜 대통령은 잇단 공약 파기 논란 속에서도 기업인에 대한 사면권 제한이라는 공약만큼은 잘 지켜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정계와 재계에서 잇따라 관련 논의를 제기하고 있는 만큼 다가올 설 특사와 3.1절 특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뉴시스

◆‘숨고르기’ 들어간 정부, 과연?
부정적인 여론이 악화되자 잇따라 가석방 논의를 제기하던 정부도 숨고르기에 들어간 모양새다. 박근혜 대통령은 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축사를 했지만, ‘기업인 가석방’이나 ‘경제인 사면’ 등과 관련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도 지난달 26일 “가석방은 법무부 장관의 고유 권한”(민경욱 대변인)이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인 바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지난 2일 청와대 신년인사회 때 “기업인들이 희망과 사기를 갖고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정치권에서 적극 협조해야 한다”고 한 자신의 발언이 ‘기업인 가석방 건의’는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새누리당의 한 중진 의원은 “몇 사람의 총수들을 풀어주려고 수십년간 이어온 행형 정책을 바꾸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기업인 사면’ 등의 조처를 취하는 부담은 당분간 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새누리당 내 친박근혜계 내부에선 여전히 “기업인 가석방이나 사면은 필요하다”는 의견이 강하고,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뜻도 강해, 경제 상황과 여론 향배, 여야 논의 등에 따라 시기를 봐 황교안 법무부 장관 등 정부 쪽 주도로 기업인 가석방 등이 전격적으로 결정될 가능성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12년 대선에서 “기업인에 대한 사면권의 엄격한 제한”을 공약한 바 있다. 박 대통령은 지금까지 이 공약을 대체적으로 잘 지켜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취임 이후 단 한번의 기업인 특사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가석방·사면을 거론한 적도 없다.

하지만 정부·여당 인사들이 잇따라 사면·가석방 논의를 제기하자 사실은 대통령이 복심을 측근들을 통해 전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가석방은 특별사면과 다르게 법무부 장관의 고유 권한인 행정 처분에 해당하지만 일반인들의 눈에는 가석방이나 사면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다가올 설 특사와 3.1절 특사에서 어떤 조치가 취해질지, 새해 벽두부터 기업인들 가석방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 시사포커스 / 김종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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