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외 군 수뇌 7명에게 도시락 폭탄 투척

4월 29일 오늘은 매헌 윤봉길의사 상해의거 제 74주년이 되는 날이다.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는 당시 이름만 겨우 유지하던 임시정부를 되살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광복의 초석이 되었으며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 받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하였다. 그러나 상해의거의 성격에 대해 잘 모르는 일부 사람들이 황당무계한 궤변으로 상해의거를 테러와 연계시켜 말하는 것을 주위에서 가끔 볼 수 있다. 이는 크게 잘못된 시각으로 우리를 당황스럽고 참담하게 한다. 윤봉길의사는 1932년 1월 28일 중국 상해 오승을 점령한 일본 침략군이 홍구공원에서 동년 4월 29일 자신들의 군사력을 세계만방에 과시하려고 개최한 "전승 및 일왕 생일 천장절 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제 전쟁범죄자 수괴를 섬멸하였다. 이러한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국가가 창설한 특공대 성격의 한인애국단이 정부의 승인을 받아 전시(戰時)에 전장[前場]인 홍구공원으로 이동해온 일본국 사령부를 기습 공격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는 전과(戰果)를 올린 전투행위이다. 이는 어떠한 우리나라 독립군 부대도 단일 전투로서는 해 내지 못한 대전과(大戰果)로, 일제도 윤의 사의 상해의거를 테러가 아닌 교전 중 일어난 전투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1932년 9월 일본 육군성이 작성하여 외무성에 보고한 "상하이의 천장절(천장절)식 중 폭탄 흉변하건"이라는 문서 등에서 윤의사의 상해의거로 죽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대장에 대해 공무수행중 사망이 아니라 전사(戰死)로 처리하고 윤의 사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특공대원(군인)으로 평가했다. 이에 따라 일제는 윤의 사를 군인으로 다루어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단심으로 형을 확정한 후 군 형무소에 구금하였으며 군부대 영내에서 군인들이 총살로 형을 집행했다. 이와 같이 일제도 윤의사의 상해의거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인(軍人)이 수행한 전투행위로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만약 상해의거를 테러로 본다면 헌번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 받았다고 명시한 우리나라 정부는 테러집단이 됨을 우리 모두 명심하여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논할 때, 반드시 재평가하고 재검토 되어야 될 것이 윤봉길의사 상해의거이다. 상해의거는 국가조직인 임시정부 특공대가 일제침략에 맞서 싸운 반침략전쟁(反侵略戰爭)이다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 기념일에 즈음하여, 윤봉길의사가 의거 2일전 두아들에게 남긴 자필유서 중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라는 글귀가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른다.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자유를 찾아 민족정기를 세우고자 고귀한 생명을 바친 수 많은 순국선열 중에서도 우뚝 솟은 분이 매헌 윤봉길 의사이다. 윤의사의 본관은 파평이고 고려조 명잘 윤관 대원수의 28세손으로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도중도에서 윤황공과 김원상여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관명은 우의, 아호가 매헌이고 망명후 별명 봉길을 사용 하였다.윤의사는 6세때부터 한문을 배웠고 11세때 덕산보통학교에 입학,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으나, 다음해 3 ·1운동을 계기로 일제 식민지 교육에 반대,자퇴하고 최병대문하에서 한학을 배웠다. 1921년 오치서숙에 들어가 사서오경을 통독하며 유학에 잠심하였다. 15세때 배용순 규수와 결혼하고 이 무렵 오치시회에 자주 장원하여 문명을 떨치며 명추,옥타,임추,염락등의 시문집을 엮었다.한편 윤의사는 이 무렵부터 신문잡지를 구독하고 신학문 서적을 탐독 열심히 근대신사조를 수용하였다. 윤의사는 19세 때인 1926년부터 야학,독서회,월진회등을 주재하여 농민운동에 앞장섰다. 그 이듬해에는 '농민독본'을 저술하고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세워 농촌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 윤의사는 23세때인 1930년 3월 6일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려는 결의를 품고 '장부출가생불환'이란 글귀를 남기고 망명길에 올랐다. 선천에서 일경에게 피검되기도 하였으나 달포만에 풀려나자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를 시찰하고 따렌을 거쳐 찡따워에 이르러 잠시 동포 경영 사업에 취업하였다. 그 이듬해 1931년 5월 8일 목적지 상하이에 도착,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 김구를 찾아 살신구국의 큰 뜻을 밝히고 주근양독하며 대지를 이룰 경륜을 세웠다.일제는 이해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유린하고 이어 이듬해인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을 일으켜 중국본토 침략을 시도하였다. 일제는 이런 배경에서 그들위성국 '만주국'을 세우며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기하여 전승기념축전을 홍구공원에서 개최한다고 공언하였다. 윤의사는 이때를 기하여 대망의 역사적인 상해 홍구공원의거를 결행하였다. 이보다 3일전인 4월 26일 한인애국단원이 되어 단장 김구 입회하에 태극기앞에 "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고 선서하고 같은 달 28일과 29일 홍구공원을 답사하면서 의거결행의 만전을 도모하였다. 마침내 의거일인 1932년 4월 29일, 윤의사는 아침 일찍 김국 단장과 아침식사를 마치고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과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을 김구 단장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오전 7시 50분경 홍구공원에 입장하였다. 경축식전 중앙 높은 단상에는 침략군 총사령관 육군대장 시라카와와 주중국공사 시게미쓰등 일곱명의 상해사변 원흉들이 천주를 기다리고 도열하고 있었다. 윤의사는 경축전행사가 관병식을 마치고 축하신순으로 들어가 일본국가가 제청되고 그것이 끝날 무렵 도시락 폭탄은 땅에 내려놓고 어깨에 메고 있던 수통폭탄의 안전핀을 뽑고 앞으로 돌진하면서 단상 위로 힘껏 투척하였다. 그 폭탄은 그대로 단상 칠흉들 면전에 명중하면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광음을 내고 경축식장이 순식간에 침략자의 천주응징장으로 돌변하였다. 이때가 오전 11시 40분 경이다.결국 시라카와는 전신 24개처의 파편을 만장 신음하다 사망하고 해군 함대사령관 노무리 해군중장은 실명하고 제 9사단장 우에다 윤군중장은 다리가 절단되었다. 또 주중공사 시게미쓰는 다리가 부러져 쩔둑발이가 되었고 가와바다 거류민단장은 창자가 터져 즉사하였고 주중 총영사 무라이와 민단간부 토모노등도 각기 중상을 입었다.윤의사의 파천황의 이 의거는 온 겨레는 물론, 일제의 침략을 질시하던 중국 관민들이 기뻐하며 마지 않았다. 그 보다도 윤의사의 이 의거는 역사의 순리를 거역한 일제의 한국 침략과 그르 이은 중국 침략을 응징한 것으로 제국주의 멸망의 조종을 울린 것이다. 더욱이 윤의사의 이 의거와 순국은 저상하던 한국독립운동의 새 전기를 마련하고 나아가 한중공동항전의 큰 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윤의사의 살신구국과 동양평화를 위한 숭고한 정신을 영원히 기리게 되었다. 윤의사는 피체시 집중구타를 당하여 일시 혼도하였고 그 해 5월 25일 일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 후 11월 18일 가나자와 윤군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우지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여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이 때가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20분경이었다. 순국현장 부근 노다산에 평장되었떤 윤의사의 유해는 해방 후 1946년 6월 30일에 조국에 반장되어 국민장으로 효창공원 의사묘역에 안장되었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윤의사의 육신은 비록 25세 짧은 일생을 마쳤으나 숭고한 정싱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혈육으로 종,담의 형제를 두었으나 민족정기의 후계자는 백대에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 청주 류병두 기자(백범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 백범문화재단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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