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좋은 소설처럼 한 장 한 장이 재밌어야 합니다”

▲ 유종필 관악구청장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이외에도 논어와 노자도덕경을 들었다. "‘논어’와 ‘도덕경’은 상호보완적입니다. 논어만 읽으면 너무 현실적이고, 현상 위주가 될 수 있어 이 두 책을 모두 읽으면 현실에 살면서 이상을 추구하는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외국 언론과 시민단체, 행정기관의 발길이 서울 관악구청을 계속 찾을 전망이다. 16일 오후 관악구청에서 만난 구 관계자는 이달까지 일본 희망제작소와 중국 CCTV 등 외국인들의 방문이 20여 차례가 넘었다고 말했다. 또한 “다음달 9일 덴마크 코펜하겐 방문단도 관악구를 찾을 예정”이라고 했다.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있다는 것 이외에 특별히 흥미를 잡아끄는 데가 없는 관악구에 외국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유종필 구청장의 ‘지식복지가 구현되어 가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 일례로 관악구에서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도서관이 들어서고 있다.

12월 16일 오후 두 시 서울대 언덕배기 칼바람을 비껴 맞으며 구청장실을 찾아가 지식복지에 대한 소신과 리더십의 원칙, 그리고 곱씹을수록 맛이 나는 행복 철학을 들었다.

Q. 시민이 겨울에 책을 가장 많이 대출해 본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학창 시절 어떤 책을 읽고 가장 감명 받았나요?
A.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헤르만 헤세의 책을 많이 봤는데 그중 ‘데미안’이란 성장 소설이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내용은 한 어린이가 자신만의 세계와 공간을 만들어 가면서 다양한 체험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절이 있어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새로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등학교 때 읽고 대학 다닐 때 또 읽고 구청장 돼서 다시 읽었습니다.

Q.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절에서 ‘파괴’는 어떤 뜻으로 이해했습니까?
A. 그것을 자아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투쟁으로 이해했습니다.

Q. ‘나는 내 안에서 나오는 나 자신의 것 이외의 것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왜 그토록 힘들었을까’ 하는 대목이 언뜻 기억나는데요. 청소년기는 어떻게 보냈습니까?
A. ‘나는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등의 본질적 고민을 많이 했어요. 보통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성장하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었습니다. 고2 겨울 흑백파동으로 연탄과 설탕이 바닥나 배급을 못 받아 불 없는 차디찬 방에서 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돌오돌 떨면서 고향집 뜨거운 아랫목을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도 가난이 이어졌습니다. 경로당 관리까지 하며 지하방을 전전했습니다. 그러다 직장을 갖고 지상 생활을 시작하면서 지하 생활을 차차 망각하게 되더군요.

Q. 요즘 청소년들은 가난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청장님에게 있었던 가난의 체험이란 지금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A. 지하방을 벗어나자 지하의 생활을 잊게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한 사람이 지하의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현재 관악구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가난은 자랑할 것도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가난하면 제 때 해야 할 일을 못할 때가 있더군요. 가난한 청소년들도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면 ‘오늘의 나’를 만든 자양분으로 생각하게 될 겁니다.

Q. 고등학교 재학 당시 이른바 ‘지하서클’에 가입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A. 광주학생운동을 촉발시켰던 박준채(해남출신‧1914~2001) 선배까지 올라가는 전통의 독서회였습니다. 가입하면 퇴학이라는 엄포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가입한 독서회는 거창하게 ‘자아 완성과 민족의 이익’이라는 목표를 내세운 모임이었어요. 자아 완성이 먼저냐 민족의 이익이 우선이냐는 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인 기억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선배들을 알게 됐고 국내·외 문학작품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죠. 이 경험은 훗날 언론계나 정치권에서 활동할 때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Q. 관악구 행정을 책임지고 하다 보면 대인관계 등 스트레스가 많을 텐데요. 그럴 때마다 자기 조절을 어떻게 하십니까?
A. 정도전의 근정전 기문(記文)에 “아침엔 정무를 보고, 낮에는 사람을 만나고, 저녁에는 지시할 사항을 다듬고, 밤에는 몸을 편안히 해야 하니 이것이 임금의 부지런함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글귀 중 몸을 편안히 하라는 말은 휴식을 잘하라는 말로 휴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최고의 선물입니다.

Q. 단순히 휴식만 하시나요?
A. 가끔은 시간을 내 캠핑을 다녀오기도 하고 그때그때 찍은 영상을 보며 좋은 기억을 살려 스트레스를 쫓아냅니다. 가끔은 예측불허의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 “소설책 한장 한장이 재미있어야 합니다. ‘60세까지는 자식을 위해 고생하고, 환갑 지나고부터 내 인생을 찾겠다’ 하는 건 재미없고 실패한 소설입니다. 지금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Q. 예측불허의 여행이라 하면?
A. 목적 없는 여행이 진짜 여행이죠. 제 여행의 묘미는 ‘즉흥성’입니다. 아내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면서 기분기분에 따라 어디 갈지를 결정합니다. 이 때만은 계획에서 벗어나 순간순간의 선택에 따르자는 것입니다. 이런 여행에서 목적지는 두 번째 고려 사항입니다.

Q. 인문학과 구정(區政)을 융합하는 실천 행정가로 유명하신데요. 인문학의 중요성을 느낀 계기나 사건이 있으신가요?
A. 어릴 적에는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책을 읽을 기회가 적었으며 인문학에 대해 잘 몰랐죠.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해 학교 도서관을 알게 됐고 독서반에 가입해서 책을 읽고 토론하다가 인문학에 눈을 떠 대학에 가서 철학과를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그러다 국회도서관장직을 맡으면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세계의 많은 도서관을 접하게 되면서 인문학이 제게 더 깊이 각인됐습니다.

Q. 세계 유수의 도서관 중 특히나 인상적인 도서관이 있었나요?
A. 많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꼽고 싶습니다. 이 도서관은 거대한 해시계 모양으로 지중해를 향해 16도 기울어진 원반형 지붕은 그 직경만 160미터, 둘레가 5백 미터, 넓이는 2만 평방미터가 되는 건물이지요. 이 거대한 공간 내부는 우리가 흔히 보는 건물처럼 공간이 층별로 배타적으로 분할돼 있지 않고 통으로 뚫려 있습니다.

지하 16미터, 지상 37미터, 11층인 이 구조물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내부가 트여 계단식으로 펼쳐져 있지요. 소통 속에서 조화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겁니다. 건물 자체만 봐도 건축물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바로 그 안에 인류 정신의 보고가 담겨 있는 거지요.

Q. 인문학을 구정(區市)과 연결하신다는 생각에 개인적으로도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인문학적 구정이란 한 마디로 뭐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까?
A. 제 구정 철학의 핵은 주민들 삶의 질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함께 인문학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인생의 근원적인 것을 탐구하고, 진정한 행복에 대해 생각하고, 남을 이해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 유종필 관악구청장에게 지식복지 시대는 우리 모두가 햇볕을 받듯 모든 사람이 지식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시대다. 그 시대의 햇살이 관악구를 비추고 있다.

Q. 외국인들까지도 관심을 갖는 ‘지식복지’라는 개념은 지금 물질 가치만 강조하는 현 복지시스템에 대해 도전적 가치까지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A. 현대인들은 너무 물질 위주로 살고 있습니다. 자동차, 주택 등 물질적인 것을 위해 대출받고 대출을 갚기 위해 희생하며 그런 삶들을 살아왔고 또 살고 있습니다.

지금 밥을 굶는 아동은 없지만 책을 사보는 아동은 드물다고 봅니다. 아동의 정신의 결핍은 두고두고 인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영양 공급을 시켜줘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햇볕을 쬐듯이 지식의 혜택을 받게 하자 그것이 바로 지식복지입니다.

Q. 구정 활동을 체험하신 좋은 지도자의 조건이 있으십니까?
A. 첫째로, 지도자는 비전 제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기획 조정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셋째, 국가보안법상의 찬양‧고무죄입니다.

Q. 찬양‧고무죄(국가보안법 2장 7조)라 하시면?
A. 국가 안보와 관련해서 중요하다고 판단했기에 찬양‧고무죄를 앞쪽에 배치한 것 아닙니까?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듯이 리더는 자신과 함께 하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잘 했다는 칭찬을 해줘서 힘을 불어넣어주고 고무(鼓舞)란 말 그대로 북을 쳐서 춤추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웃음).

Q. 2014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신년 구상이 있으신가요?
A. 민‧관 협치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장할 생각입니다. 민‧관 협치란 민간의 다양성‧창의성과 관의 안정성‧책임성을 결합한 행정 방식입니다. 이미 구정 4개년 계획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자원봉사도 활성화돼 등록자만 8만 4천명에 실제 활동하는 사람은 1만명에 육박합니다. 내년 초에는 또 교육문화센터가 준공됩니다.

저희 구에는 현재 어린이집이 300개 정도 있습니다. 국공립 어린이집은 자녀를 둔 부모들이 가장 선호합니다. 내년에는 구립 어린이집을 8개를 신축하고 민간 4곳이 구립으로 전환됩니다. 8개 곳을 리모델링 할 생각입니다.

또 내년에는 관악혁신교육지구사업을 유치해 서울시와 교육청, 관악구를 잇는 교육 협력체계를 구축할 계획입니다.

Q. 마지막으로 관악구민 여러분에게 덕담 한 마디 하시면 좋겠습니다.
A. 믿고 맡겨 주신 덕분에 민·관 협치 등 여러 사업이 순항하고 있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도 구민 여러분의 의견을 받들고 나가겠습니다. 내년에도 오늘 바로 이 순간을 즐겁게 살아가는 구민 여러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소설은 한 장 한 장이 재밌어야 합니다. 결론만 재밌어서는 안 됩니다. 즐겁게 살다 보면 좋은 결과가 뒤따릅니다. 고맙습니다.

 

유종필 관악구청장은 매주 국장단 회의를 열어 시민들의 민원 및 건의 사항을 해결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16일 현재 총 3,888건의 민원 및 건의 사항 중에서 법적으로 가당치 않거나, 불합리하거나, 터무니없이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것을 제외한 92.5%의 안건이 처리됐다.

◯ 유종필 관악구청장 프로필

▲1957년생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한국일보 기자 ▲한겨레신문 기자 ▲기자협회보 편집국장 ▲서울시 시의원 ▲청와대 비서관 ▲국립영상간행물제작소 소장 겸 한국정책방송(KTV) 대표 ▲노무현 대통령후보 언론특보 ▲민주당 대변인 ▲제17대 국회도서관장

◯ 저서
『세계도서관기행』 웅진 2010, 『좀 다르게 살아도 괜찮아』 메디치 2013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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