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임시정부의 파수꾼 (一波 嚴恒燮)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국 광복과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엄항섭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엄항섭은 1898년9월1일 경기도 여주에서 승지를 지낸 엄주완의 아들이 태어났다. 본관은 영월이고 일명 예빗엄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일파라는 호를 주로 사용했고 필명으로는 대위를 사용한 근대사의 지성이었다. 1919년 보성 법률상업고등학교(현 고려대학교 전신)재학중에 전국적으로 거족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을 겪으면서 조국의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기로 결심하고 그해에 중국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한 엄항섭은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났고 김구를 선생님으로 모시고 보좌하며 임시정부에서 법무부 참사에 임명되어 활동을 하였다. 엄항섭은 임시정부를 잠시 떠나 항주에 있는 지강대학에서 중국어,영어,불어등 어학을 공부하였으며 후일 그가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1922년 지강대학을 졸업한 후 엄항섭은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그동안 상해의 임시정부도 많이 변해있었다.미국에 있던 대통령 이승만은 상해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국무총리 이동휘도 떠났다. 여러가지 힘든 상황들로 인하여 임시정부는 정부로서의 조직을 유지할수 없을 정도로 어려워졌고 김구와 이동녕을 비롯한 몇 몇 인사들만이 임시정부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져 임시정부청사의 집세를 내지 못할 형편이었고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있던 김구,이동녕등의 인사들조차 끼니 걱정을 해야할 정도로 궁핍했다. 엄항섭은 어떻게 해서든 임시정부는 유지시켜야 한다고 결심하고 그 방편으로 불란서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을 하였다. 그리고 월급을 받은 돈으로 임시정부요인들의 끼니를 해결하고 또 한편으로는 일본영사관에서 한국인 동포들을 체포하려는 정보를 얻어내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당시의 사정을 김구는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엄항섭군은 유지청년으로 지강대학을 졸업후 자기집생활은 돌보지 않고 석오 이동녕선생이나 나처럼 먹고 자는것이 어려운 독립운동가를 구제하기 위해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을 하였다. 월급을 받아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주는것과 일본 영사관에서 우리를 체포하려는 사건을 탐지하여 피하게 하고 우리 동포중 범죄자가 있을때 편리를 도모해주려는 것이었다. 상해 임시정부가 1920년대 중반에 부딪혔던 어려움을 극복할수 있었던것은, 그리고 임시정부라는 조직이 존립할수 있었던데에는 엄항섭의 공헌이 적지 않았다. 당시 엄항섭은 20대의 청년이었다. 엄항섭이라는 한 청년의 힘이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존립시키는 원천이 되었기에 임시정부를 지켜낸 인물 즉, 임시정부의 파수꾼이라고 불러주게 되었다. 엄항섭은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래 줄곧 김구와 함께 활동하였다. 김구가 활동하는곳에는 언제나 엄항섭이 있었다. 김구와는 스물두살 나이 차이가 있었다. 김구가 작성하여 발표하는 각종 글을 번역하는것도 엄항섭이 하였고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세상에 알리는 역할도 엄항섭이 했다. 1933년 봄 남경에 장개석을 만나러 갈때도 엄항섭은 김구를 수행하였다. 중국은 김구가 주도한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크게 감격했다. 중국은 이 면담후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하였고 한인 청년들을 낙양군관학교에서 훈련하도록 해주었다. 엄항섭은 1930년 1월 김구,이동녕,안창호,조소앙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질곡의 역사속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뒤 1940년에 다시 한번 민족주의 세력이 총결집을 이룬 한국독립당이 재탄생 되었다.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은 김구가 선임되었고 엄항섭은 홍진,조소앙,조시원,이청천,김학규,유동열,안훈,송병조,김동중,양명진,조성환,차기석,이복원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중경에 정착하게 되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상해를 떠나 항주로 옮겼던 임시정부는 진강,장사,광주,유주,기강 등지로 이동해 다니다가 중경에 정착하였다. 당시 중경은 중국국민당정부도 임시수도로 정한 곳이었다. 중경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 체제로 정비되었고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엄항섭이 대외적으로 그의 이름을 나타낸것은 임시정부의 선전부장이었다. 1944년 임시정부는 김구를 주석, 김규식을 부주석으로 선임하였고 종전의 내무,외무,법무,군무,재무의 5부에서 문화부와 선전부를 증설하고 이때 엄항섭이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11월23일 엄항섭은 꿈의 그리던 조국에 임시정부와 함께 환국하였다. 국내에서도 엄항섭은 임시정부와 함께 김구선생의 곁을 떠나지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국토는 38선으로 분단되었고 미군정 하에서는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활동할수 있는 공간도 여건도 없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 추진되자 엄항섭은 이를 반대하며 김구선생과 함께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 남북협상에 들어갔으나 통일된 정부수립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결국 남북에 각각 단독 정부가 수립되어 민족분단의 비극을 맞았다.민족 분단도 통탄할 가슴아픈 민족의 비극이었지만 엄항섭에게는 더 커다란 슬픈일이 일어났다. 1949년 6월26일 선생님으로 모시고 존경하던 백범 김구선생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그렇게 염원하던 민족통일의 희망이 깨어진 상황에서 같은 동족 안두희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민족적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김구선생이 서거하신 후 엄항섭은 믿고 의지할 곳도 없어지고 민족 통일의 희망도 사라져 버렸다. 김구 선생과 엄항섭 선생이 그렇게 걱정하던 민족 분단은 결국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으로 이어졌고 그 전쟁의 비극속에서 엄항섭선생도 1950년 9월 남북되어 끌려갔다. 선생은 북한에서 통한의 세월을 보내시다가 민족통일의 희망도 보지 못한채 1962년 7월30일 북녁땅에서 쓸쓸히 서거하셨다. 대한민국 정부는 엄항섭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연미당 선생(1908~1981,일파 엄항섭선생의 부인,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1990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애국장 수상자는 연미당이다. 연 선생은 경기도 여주 출생으로 1930년 8월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한인여자 청년동맹에서 임시위원으로 선출되어 상해 청년 여자교민에 대한 조사 및 상해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교민들의 단합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상해에 있는 한인 각 단체 대표자회의에 여자 청년 동맹의 대표로 참석하여 배일 활동을 전개하였고 1936년 5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가흥,진강을 거쳐 장사로 이동할때 임시정부 요인들을 수행하여 봉사하기도 하였다. 1938년 10월에는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 대원이 되어 선전과 홍보에 주력하였고 1943년 2월경 중경에서 한국애국부인회의 조직부장으로 선출되어 반일의식을 고취시키는 방송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1944년에는 중국 국민당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협조로 대적선전위원회를 통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상황을 우리말로 방송하였다. 또한 일본 군내의 한국인 사병에 초모공작을 하면서 한국 여성들의 총궐기를 촉구하며 활동하는 한편 한국 독립당에 입당하여 조국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청주 류병두 기자(현 백범 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위원회와 백범문화재단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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