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세계에서 25번째로 살기 좋은 나라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지난 3일 영국 레가툼 연구소가 세계 142개 나라를 대상으로 한 ‘2014 세계 번영 지수’를 발표한 결과 한국은 25위로 싱가포르(18위), 일본(19위), 홍콩(20위), 대만(22위)에 이어 아시아에서 5번째를 차지했다.

싱크탱크인 레가툼 연구소는 지난 2008년부터 경제, 기업가 정신, 국가 경영통치 능력, 교육, 개인자유, 보건, 안전안보, 사회적 자본 등 8개 분야의 점수를 토대로 살기 좋은 나라 순위를 발표하고 있다.

이 발표가 나자 정말 25위? 하며 믿기 힘든 사람도 적잖다. 올해 우리 사회를 밑바닥부터 흔들어 놓았던 사건들의 파동은 쉽사리 사라질 성질의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윤일병집단구타사망사건, 칠곡계모‧김해여고생 사건 등 참변들이 연이어 터져 나온 한해였다.

레가툼 연구소의 이번 발표는 2013년 자료를 바탕으로 조사됐다. 그렇더라도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한국은 좀 안심이 되는 나라다. 지금 미국 주도의 공습 작전이 펼쳐지고 있는 시리아‧이라크나 에볼라가 창궐하는 서아프리카나 하루 생계비 1,000원에 못 미치는 아프리카 서북부의 나라들과 비교해 보면 썩 괜찮아 보인다.

세부사항을 보더라도 한국은 경제(9위), 교육(15위) 등 6개 항목에서 상위권(1∼30위)에 올랐다. 다만, 개인 자유(59위)와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협력과 연결망을 일컫는 사회적 자본은 69위에 그쳤다.

이 발표와 거의 동시에 과연 같은 나라에 관한 내용일까 하는 의심마저 일으키기에 충분한 통계가 보도됐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4일 전국 18세 미만 아동을 양육하는 4,007가구를 대상으로 ‘2013년 한국 아동 종합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한국 아동 ‘삶의 만족도’는 100점 만점에 60.3점으로 최고점을 받은 네덜란드의 94.2점과는 무려 30점 넘게 차이 나며 경제협력개발기구(오이시디, OECD) 34개국 중에서 꼴찌를 차지했다. 한국보다 한 단계 위인 루마니아와도 16점 이상의 차가 났다.

또한 우리나라의 소득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0.302로 34개국 중 21위로 하위권에서 맴돌고 있다. 지니계수는 0~1 사이의 수치로 0에 가까울수록 소득이 잘 분배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통계 중 과연 어떤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을 좀 더 사실에 가깝게 묘사한 것일까? 우문(愚問)인 줄 안다. 통계를 잡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하기가 힘들다. 레가툼 연구소의 통계나 지니계수는 일정한 잣대를 각 나라에 대고 잰 것이기 때문에 비교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객관적인 의미를 획득한다고 볼 수 있지만 보건복지부의 통계는 ‘만족도’란 마음의 영역을 측정하는 것이라 상대적으로 객관성을 획득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유태인 속담이었던가? ‘부부가 서로 금슬이 좋으면 바늘 끝에서도 잠잘 수 있지만 사이가 나쁘면 고대광실(高臺廣室)도 비좁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은 자기 삶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주변 대상을 이토록 달리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두 통계 중 어느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운가 하는 우문에 답하자면 둘 다 일단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면 어떨까? 따라서 우리나라는 객관적으로 경제, 교육 등 여러 면에서 지구촌에서 상위권에 들었지만 삶의 만족도는 오이시디 최악의 수준이라는 이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 사태는 겉보기에 그렇게 보일 뿐이지 사실은 우리가 몸 담그고 있는 다층적 현실이라는 것. 감히 말하거니와 이 두 통계의 의미는 나라의 정책을 책임진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고 생각한다.

멀리 갈 것 없이 한국인들의 삶에 대한 불만족도는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지에 대한 그 단서는 앞서 레가툼 연구소의 통계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통계를 보면 개인 자유도는 59위, 사회 구성원들의 협력과 네트워크를 일컫는 사회적 자본은 69위에 그쳤다. 한국인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사회가 부자유스럽다고 느끼고 있고, 인터넷 강국에 스마트폰 선진국이라는 영예 속에서도 한국인들은 상호 간의 협력과 연결성을 뜻하는 사회적 자본, 곧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인관계의 구축이라는 측면에서는 거의 아무 희망도 갖고 있지 않으며, ‘연대’의 가능성마저 포기했다는 느낌마저 든다. 엄청난 비극적 손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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