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천막으로 들어가야 하나...

한나라당이 또다시 악재를 만났다. 5.31 지방선거를 불과 40여 일 앞두고 터진 돈 공천 파문에 휘청거리고 있다. '차떼기 정당'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2004년 3월 '천막당사'로 들어간 지 2년여 만에 벌어진 상황이다. 당내에선 "썩어도 너무 썩었다"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다니…"라며 소장파들의 집단 움직임도 견지되고 있다. 한나라당은 이번 사태에 대해 "돈 공천 자기고백은 비리 척결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지만 국민들이 보는 시각은 전혀 다르다. 김덕룡(4억4000만원), 박성범(21만 달러. 모피코트. 고급양주) 의원의 금품 수수 의혹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김 의원은 13일 "당에서 출당조치해도 달게 받겠다"며 "당에서 하지 않으면 내가 조만간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당이 나를 고발했는데 당에 남아 조사를 받을 수 없다"며 탈당 의사를 밝혔다. 실제로 검찰은 한나라당 소속 의원 5~6 명 정도를 더 소환을 해 조사를 계속한다는 방침이다. 헌정사상 공천 문제로 검찰이 공개적인 수사를 진행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일 정도로 사태가 심각하다. 이재오 원내대표는 14일 김덕룡, 박성범 의원의 공천비리 의혹과 관련, 국민들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혔다. ◆돈 공천, 끊이지 않는 잡음 이번 김덕룡, 박성범 의원의 돈 공천 잡음은 처음이 아니다. 서울 마포구에서는 공천심사위원들을 대상으로 한 ‘술자리 로비의혹’이 제기됐고 성북구에서는 구청장이 시의원들에게 돈을 건네 선관위로부터 고발되는 등 잡음이 잇따랐다. 12일엔 대구의 곽성문(중.남구) 의원 측에 금품을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은 대구시의원 출마 예정자가 구속됐다. 곽 의원도 검찰의 소환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역 신문들은 곽 의원이 출마 예정자들로부터 여행 경비 등 금품과 술자리 향응을 제공받았고, 받은 돈의 일부를 조상 분묘를 단장하는 경비로 사용했다는 의혹을 검찰이 추적 중이라고 보도했다. 경기도 용인의 한선교 의원도 공천 신청자로부터 받은 골프 접대 때문에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대구에서는 한나라당 K의원이 수천만 원대의 공천 대가성 금품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투서와 관련, 검찰수사가 진행중이다. 투서에서 금품로비를 벌인 당사자로 지목된 공천신청자 1명이 12일 구속됐다. 허태열 사무총장은 이날 "김.박 의원 외에 추가로 현역 의원이나 원외인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예전 지구당위원장)이 관계된 5~6건에 대한 자체 조사가 진행 중"이라며 "조사가 끝나봐야 알겠지만 이번 사건처럼 큰 사건으로 불거지지 않는다고 확신하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당 지도부도 제2, 제3의 공천 헌금 파문이 터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이미 언론에서는 한나라당의 공천 헌금 내용까지 기사화 하고 있다. 당내에선 "조사 대상엔 서울지역 현역의원 두 명이 포함돼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각 정당마다 클린공천을 한다고 자부는 하고 있으나 정치행태가 과거의 큰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공천 헌금이라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3월 초 출범한 한나라당 '클린공천감찰단'에는 100건이 넘는 공천 비리 제보가 접수됐다. 공천 헌금과 관련된 각종 유형의 투서와 제보가 밀려들어와 일일이 혐의를 확인하기조차 힘들 정도라고 한다. 한나라당 아성인 영남지역에선 공천을 받기 위해 필요한 금품 액수가 공공연한 비밀처럼 떠돌고 있다. 또한 당 관계자들은 공천 신청자들 중 상당수는 돈보따리를 들고 다닌다며 공천 정찰제에 대한 얘기를 했다. 경남의 한 지역에선 "기초의원 1억~3억원, 광역의원은 3억~5억원, 기초단체장 공천엔 10억~15억원이 정찰가"라는 이야기가 출마 희망자들 사이에 돌았다는 게 한나라당 관계자의 증언이다. 출마 희망자들이 이곳을 찾은 당 관계자들에게 "그 액수를 주면 정말로 공천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 코미디까지 빚어지고 있다. ◆심사기준, 그때그때 달라요 공천에서 탈락한 공천신청자들의 탈당이 이어지고 있다. 경선이건, 전략공천이건 공천과정과 심사기준이 명확하지도 투명하지도 않기 때문에 민주적 절차를 기대했던 탈락자들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 투명한 경선을 외치고는 있지만 심사기준이 새로운 경선 후보들이 나타날 때마다 달라지고 있는 현상이 일고 있다. 당에서는 전략공천을 하고는 싶은데 당의 반발이 심해 경선을 하는데 그때의 경선 기준이 전략공천 대상자가 유리한 쪽으로 가고 있다. 한나라당 삼척시장 후보 공천과 관련 삼척시당원협의회 운영위원들은 12일 "선거인단 경선을 요구했지만 도당과 공천심사위가 일방적으로 전략공천을 강행했다"며 "공천 심사 기준이 없다"고 비난한 뒤 탈당했다. 한나라당 충북도당은 여성 후보 공천 확대를 공언하며 후보 추가 공모까지 나섰으나 실제 공천에서는 기초의원 후보 1명만을 공천해 지역 여성계로부터 "여성들을 기만했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대구 중구청장 공천에서 탈락한 정재원 대구 중구청장과 중구지역 기초의원 낙천자 7명은 기자회견을 열고 "당원 530명과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한나라당 인천 시의원 경선에서 탈락한 신경철 시의원은 "경선 선거인단에 참여한 일반 당원 비율이 지나치게 낮았고 동별 유권자 수의 비율을 무시한 채 대의원을 배정하는 등 특정후보를 위해 경선이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심사기준을 무시한 채 공천이 일어나면서 후보 탈락자들이 심하게 반발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나라당 텃밭에서 벌어진 공천 헌금 한나라당에서 공천 헌금 파문이 터진 것은 한나라당 공천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구. 경북 지역 등 한나라당 강세지역에서는 '공천=당선'이란 등식이 성립한다. 열린우리당의 낮은 지지율도 원인이 됐다. 높은 당 지지율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당 관계자는 "기초자치단체장은 실질적으로 국회의원보다 많은 권한을 갖고 있어 영남과 수도권의 웬만한 지역에서는 과열양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 지역에서는 윤진 서구청장과 이종화 북구청장을 서구, 북구청장 후보자로 공천했고, 임병헌 전 대구시 기획관리실장을 남구청장 후보로 예고했다. 공천 전부터 내정설에 휩싸여 있던 인물들이 그대로 지방선거 후보로 나왔다. 경북지역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23개 시.군 가운데 이날 현재 후보자를 낙점하지 못한 경주, 경산, 영천, 김천, 상주, 봉화 등 6곳은 공천을 둘러싼 ‘마찰음’이 연일 들려오고 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외부인사를 참여시킨 공천심사위원회를 가동하는 등 공천 투명성 제고를 외치고 있지만 아직도 과거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공천과정에서 지역구 의원의 지나친 영향력 행사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고 말했다. 클린을 외치고 있지만 도덕 불감증도 큰 문제다. 공천 과정에서 현역의원이나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들의 영향력이 워낙 크다. 그래서 이들을 상대로 한 로비가 치열하다 보니 '도덕 불감증'이 만연한 상태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자신의 보좌관과 전 보좌관, 운전기사를 지낸 비서, 홍보물 기획자 등 측근 5명을 광역, 기초 의원에 무더기로 공천하려다 잡음이 일어 당 차원의 조사를 받고 있다. ◆당내 소장파 의원들과의 갈등 조짐 한나라당 소장 개혁파 의원들이 화가 났다. 이번 공천 헌금 사태에 대해 지도부 책임론을 제기하는 등 당내 갈등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은 김덕룡, 박성범 의원의 공천비리 의혹이 불거지자, 검찰 수사의뢰라는 초강경 카드를 꺼내들었다. 당 지도부는 ‘읍참마속’의 심정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공천비리 척결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재오 원내대표는 14일 국민들에게 사과를 하면서 “국민 여러분께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관련된 공천 잡음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 말씀을 드린다"면서 "진정 한나라당은 거듭 나려 한다"고 강조 했다. 이 원내대표는 "검찰 수사 의뢰라는 정당사 초유의 일에 대해, 당의 입장은 한국 정치의 고질적 부패의 고리를 차단코자 하는 혁명적 결단이었다는 것"이라면서 "한나라당은 잘못이 깊은 만큼, 그 잘못을 반성하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는 용기도 다른 당에 비해 강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당내 중진 의원들과 소장 개혁파들을 중심으로 상반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당 지도부가 현실을 너무 안이하게 보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특히 수요모임 등 당내 소장 개혁파 의원들은 지도부에 공천비리를 사전에 방지하지 못한 책임을 돌리며 비상대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수요모임 대표 박형준 의원은 "비상 대책에는 지도부 총 사퇴도 포함된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지도부 사퇴론이 전면에 부상할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소장파 의원들은 공천비리 의혹과 관련해 조만간 회동을 갖기로 했다. 반면 당 지도부는 소장 개혁파들이 주장하는 당 지도부 사퇴론은 정략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허태열 사무총장은 "공천비리에 대해 원칙대로 잘 처리했는데 왜 지도부 책임론이 끼어드냐"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당내 일각에서는 공천비리의혹 파문이 7월 전당대회와 맞물려 당의 지도부와 소장 개혁파간 세 대결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최연희 의원의 성 추행 파문으로 시작된 한나라당의 악재가 이번 김덕룡, 박성범 의원의 공천 헌금으로 그 정점에 오르고 있다. 높은 당 지지율로 이번 지방 선거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을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삼고 완승을 거두려던 한나라당의 선거 전략에 차질이 빗게됐다. 지난 2004년 차떼기 당이라는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면서 눈물을 삼키며 천막당사로 들어간지가 이제 2년이 됐다. 박근혜 대표가 당권을 쥐면서 조금씩 잊혀져 가던 ‘돈’ 의 문제가 또다시 한나라당의 발목을 움켜쥐고 있다. 이번 공천 헌금으로 한나라당이 지방선거를 완패하고 또다시 천막으로 그 적을 옮길지 아니면 이 악재들을 잘 수습해 완승을 거둘지 이기든 지든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는 요즘 잠 못드는 밤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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