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냐 컨텐츠냐 헷갈리는 유권자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은 ‘이미지’ 열풍이 불고 있다. 후보자뿐 아니라 정당 차원에서도 발 벗고 나섰다. 그 정점에는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서 있다.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은 5일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하면서 덕수궁 돌담길과, 출마 기자회견을 했던 정동극장을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강 전 장관의 출마선언은 출마내용보다 ‘보랏빛 정치’라는 이미지가 주목을 받았다. 이미지 정치와 이미지 선거 전략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텔레비전 토론이 도입된 97년 대선부터 시작해 2002년 대선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노사모’ 열풍이 불면서 전국에 노란 바람의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지난 17대 총선에서도 이미지 선거의 강력한 영향 아래 치러졌다. 방송과 신문은 물론 인터넷 등 매체 환경이 급변하면서 정책이나 콘텐츠보다 정치인 이미지가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저마다 이미지 정치를 하면서 경쟁자에게 “콘텐츠는 없이 이미지 정치만 한다”고 비판하는 상황이다. 이미지 정치를 놓고 정책선거를 약화시킨다는 비판 못지않게 이미지는 정치인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나아가 대중에게 호소하는 정치인의 이미지에서 시대적 코드와 국민들의 욕망을 읽어야 한다는 주문도 있다. ◆‘이미지 정치’, 만만치 않다 각 정당이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미지에 호소하는 정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젊은층의 투표율이 선거를 계속 할수록 떨어지는 상황에서 각 정당들은 10대와 20대를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나라당은 ‘튀는 10대! 뛰는 한나라당! 다양한 목소리! 업그레이드 한나라당!’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첫 선거권을 가지는 10대들의 정서와 감성을 대변하겠다”며 하이틴 부대변인을 공모하고 있다. 선거기간 동안 선거운동원들이 입을 단체복을 공모하고, 선거방송을 이끌 진행자(VJ)도 공개적으로 뽑기로 했다. 선거동안 쓸 핵심 구호를 온라인을 통해 공모하고 선거 로고송도 젊은이들의 지혜와 감성에 기대고 있다. 열린우리당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미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플래시몹이나 2006 독일 월드컵을 대비해 꼭짓점 댄스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 우리당 뿐만 아니라 선거 지원자들도 이미지 중심에 서있다. 진대제 경기지사 후보는 출정식에서 로봇을 대동하고 나와 “반도체 정치”를 선언했고,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뒤늦게 합류한 오세훈 전 의원은 환경운동 경험을 살려 ‘녹색’ 정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차기 유력 대권 후보들도 이미지 정치의 큰 수혜자들이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앵커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을 가지고 뛰어난 대중연설과 민생투어로 당 지지율을 17대 총선 당시 40%에 육박하게 끌어올리면서 정치적 위상을 다졌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당권을 잡자마자 텔레비전 연설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과거를 회고하며 ‘눈물’을 보여 지지층의 감성을 자극하는 ‘감성정치’의 진수를 보여줬다. 박 대표는 정치인 가운데 가장 많은 미니홈피 방문자를 자랑하고, 미니홈피를 통해 지지자들과 감성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등 이미지 정치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쇼와 이벤트 끝나면 이미지는 사그라지기 마련 정치권이 이미지 정치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정책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차별성을 들어낼 수 없고 유권자에게 감동시킬 비전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여론조사기관 리서치플러스의 임상렬 대표는 “여야간 정책 차이나 이념적 차별성이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 다름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이미지”라며 “콘텐츠 정치에 실패한 정치권이 선거를 앞두고 어쩔 수 없이 이미지 정치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이미지 정치의 한계는 명확하다. 임 대표는 “유권자들이 처음에는 이미지로 흥미를 가질 수 있고, 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으나 쇼나 이벤트가 끝나면 거품이 꺼진다”며 “콘텐츠가 없다면 지속적인 이미지 유지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미지 정치’의 범람은 여전히 뿌리 없는 한국 정당구조의 아픈 현실이라고 말한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이미지 정치’가 먹혀드는 이유는 정치권에 대한 국 민들의 염증과 반(反)정치 성향 때문이다”고 말한 뒤 “국민 들이 반정치 성향을 갖게 되다 보니 기성 정치권은 자체 재생산 을 못하고 끊임없이 정치권 외부에서 수혈을 받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런 이미지 정치는 “정책선거를 실천하겠다”던 매니페스토(공약검증)를 선언한 각 당의 입장과는 크게 다르다. 서울시장 선거가 이미지 선거로 가는 것에 대해 한나라당의 홍준표, 맹형규 예비후보들도 비관론을 제기하고 있다. 맹 전 의원은 논평을 통해 "실용과 생산의 정치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알맹이 없는 이미지 정치가 주인행세를 하려고 한다"며 "이미지 정치는 망국적 지역주의처럼 '묻지마 투표'를 조장한다는 측면에서 또 다른 정치 독초"라고 공격했다. ◆정책과 이미지 사이의 간극 검증해야 이미지가 콘텐츠에 종속된 것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이미지 정치를 새롭게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한국에선 이미지가 관습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여지는데 세계적인 추세는 그렇지 않다. 이런 ‘이미지 정치’는 1961년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전 지구적 현상이 됐고, 정치인들이 가장 애용하는 관습이 됐다. 물론 이미지를 앞세워 당선된 뒤 이미지만을 위한 정책을 제시한다면 유권자는 또 다시 실망하고 정치권에 냉소적 입장을 가지게 된다. 이미지만 있고 정택이라는 컨텐츠가 개발이 안 된다면 그 이미지는 바로 허상이 된다. 안병진 창원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이미지 정치를 비판하는 것이 관습적이고 상식처럼 되어 있으나 과도한 면도 있다”며 “정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미지와 정책을 별개로 분리할 수 없고, 이미지 속에 정책적 함의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또한 안 교수는 이미지 정치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는 강금실 전 장관에 대해 서도 “이미지를 뒷받침할 콘텐츠가 없다면 쉽게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며 “새로운 세대의 문화적 감수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서울시장으로서 서민들의 행복을 구현할 콘텐츠가 있는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손학규 경기지사는 11일 SBS 라디오에 출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쇼에 나가는 말이 아니라 쟁기를 끄는 말이며, 얼굴이 아니라 실력, 말이 아니라 땀, 이미지가 아니라 실천이 중요하다"며 이미지 선거전을 비판했다. 이미 이미지 정치를 잘 활용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언론이 적절한 견제와 비평을 통해 이미지를 판단한다. 그래서 이미지 정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언론이나 유권자가 치밀한 검증을 통해 빈껍데기의 이미지인지 아니면 정책이라는 컨텐츠가 뒷받침 된 이미지인지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어느때보다 ‘이미지’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 5.31 지방선거다. 쇼와 이벤트 끝나면 이미지는 사그라지기 마련이라는 주장과, 정치인 이미지에 시대적감성과 대중들의 욕망이라는 주장 등 상반된 의견 들이 분분한 가운데 유권자들은 이미지 바람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정책이라는 컨텐츠를 선택할 지는 이번 지방선거가 끝나봐야 알 수 있다.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